그를 울리고 싶었다. 고운 눈매에서, 서러운 눈물을 뽑아내고 싶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고스란히 담아냈으면 했다. 퍼석거리는 입술로, 살려달라고 빌었으면 했다. 나는 그를 더럽다고 욕하면서도, 지독하게도 원했던 것 같다. 내 바람과는 다르게- 고개를 모로 돌린채 한마디 신음도 없이 고스란히 참아내는 그를 보면서, 독하다고 생각했다. 그 모습에 더 화가 치밀어서, 거칠게 안았다. 그 말끔한 얼굴에 주먹질을 했다. 일종의 오기였다. 피가 멍울진 입술을 거칠게 물어뜯으며, 나는 아주 조금 서러워졌다.
사랑을, 하지 말걸 그랬어. 그렇지, 혜성아.
굴레 Written by 모코
“그냥 한대 맞아줄테니까, 깨끗하게 끝내자. 어?”
“.... 씨발새끼.”
“질렸어, 이젠. 난 온통 너덜너덜해졌어. 이제 그만 편하게 살래. 안그래, 형?”
"형? 지금 너 형이라고 그랬냐? 씨발... "
멱살을 쥐어챈 건, 순간이었다. 정혁의 음울한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득였다. 혜성은, 정혁의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셔츠 앞섶이 불편하게 당겨져 숨을 격하게 몰아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웃음이 비죽비죽 튀어나왔다. 정혁의 구겨진 얼굴 위에, 싸늘한 웃음을 뱉어냈다. 이제 와서 어쩔건데. 이미, 너절하게 찢어진 내 가슴을 어쩔건데.
애초에, 이런 새끼를 사랑한게 잘못이지. 혜성은 이제서야 후회란 걸 했다. 네까짓게 무슨 사랑이야. 그리고 나 같은게 무슨 사랑이야. 우리는 그저, 처절하게 서로를 증오하면 그만인 것을. 우린,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인데. 그래서는 안되는 사람들인데. 멍청하게, 왜 너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절대 안돼. 난 너 못놔. 너 진심 아닌거 알어. ”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정혁이 이렇게 분노하는 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끝이 예상보다 너무 빠르게 찾아왔다는 거였고- 두번째는, 그게 혜성의 일방적인 통보로 이루어진 것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다. 니가 감히 나를 물먹여? 정혁도 나름대로 할 말이 많았다. 처음 생각은 녀석을 앞에 앉혀두고 차근차근 설득해볼 작정이었다. 우리는 아직 헤어져서는 안되고, 헤어질 수도 없으니까. 언젠가 헤어질 날이 올거라는 건 알지만, 아직은 절대로 그럴 수가 없으니까.
그러나, 잔뜩 독기 오른 혜성의 눈동자에, 그만 정신이 확 나가버린게 화근이었다. 다짜고짜 녀석을 옥상 한켠으로 밀어붙여서 그 말끔한 얼굴에 수없이 주먹질을 하면서, 빗나간 주먹질에 손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도, 혜성의 비릿한 입매에 피멍울이 맺혀도, 정혁은 그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자꾸만 고운 입매에 부슬부슬 매달리는 비웃음이, 정혁의 심장을 온통 제멋대로 휘저어버렸다.
혜성은, 자신의 앞섶에 매달려있던 정혁의 손을 매몰차게 떼어냈다. 그 움직임이 너무나 견고하고 단단해서, 정혁의 손은 하릴없이 그대로 떨구어졌다. 혜성의 뾰족한 검지 손가락이, 잔뜩 오기가 실린채 정혁의 가슴팍을 몇번 강하게 밀었다. 어디, 한번, 들어나보자. 그렇게 세번씩이나. 정혁은 그대로 주춤, 주춤 밀리면서도 아무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변했구나, 너. 예전의 말랑하던 신혜성은 사라지고, 온전히 가시로 뒤덮인 신혜성이 눈앞에 있었다.
열여덟의 봄은 짧았다. 찬란했지만, 너무나 짧았다. 마른 몸을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건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하늘은 두 사람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금새 벌을 내렸다. 사랑이란 말을 겁 없이 토해낸 그들에게 보란 듯이 형제, 라는 처절한 노끈을 엮어버렸다. 제 아버지와 제 어머니의 재혼식 앞에서, 두 사람은 세상의 끝을 경험해야 했다. 정혁은 울었고, 혜성은 울지 않았다. 그리고는, 지옥은 시작이었다.
정혁은, 제 아버지의 재혼식 날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혜성은 그 재혼식에서 화사한 웨딩드레스를 입은 제 어머니에게 축하한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정혁은 혜성을 처음으로 안았다.
사랑한다는 달콤한 속삭임을 되뇌일때도, 정혁은 혜성에게 함부로 손 하나 대지 못했었다. 오히려 불면 날아갈까, 잡으면 깨어질까 조심스럽기만 했다. 고작, 수줍게 다가갔던 첫키스가 전부였다. 그렇게 아끼던 혜성을, 거칠게 눕히는 정혁의 눈에는 눈물이 그득했다. 먼지 가득한 체육창고 구석에서, 미친듯이 혜성을 끌어안았다. 차라리, 내게 죽으라고 하지 그래. 그렇게 쉴새없이 중얼거리면서. 제 맘에도 없는, 더러운 새끼-라는 욕을 몇번이고 토해내면서.
그러나, 잔인하게도, 혜성은 제 메마른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아이처럼 울어버린 정혁에게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형-이라고 불렀다.
형.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나의 형.
"너가 날 알아? 하.. 너, 생각 안나? 그날, 나 깔아뭉개면서 너 뭐라 그랬어. 끝까지 너 나한테 더럽다고 그랬어. 관두자, 문정혁. 너랑 말씨름 하면 머리만 아파.”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일이었지만, 혜성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먼지가 까맣게 내려앉던 체육 창고, 가늘게 스며들던 햇빛, 그 위로 무너지던 비참한 몸뚱아리. 더러운 새끼, 정혁의 짓이겨진 입매에서 튀어나온 말은 뾰족하게 그대로 혜성을 관통했다. 그 말은 고스란히 정혁 자신에게도 향해있던 것이었지만, 혜성은 그걸 몰랐다. 처절하게 혜성을 휘젓고 지나간 그 한마디 말에, 혜성은 모든 저항을 멈추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정혁의 주먹을 고스란히 맞아냈다. 비릿한 피맛이 입안에 감돌아도, 묵묵히 견뎠다. 지독한 광기로 달려들던 정혁을, 혜성은 그대로 받아냈다. 조금도 울지 않았다. 다만, 혜성은 차갑게 식어버린 목소리로 정혁을 또박또박 형, 이라고 불렀다. 그 한마디 말에 눈 뒤집히며 처절하게 발광하는 정혁을, 그저 싸늘하게 비웃었다. 그건, 혜성의 마지막 남은 오기였다.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너는 그러면 안되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가 내게 손가락질 해서는 안되잖아. 안그래?
형제, 라는 말도 안되는 테두리에 얽힌 두 사람은, 끝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이 그렇게 쉽게 무 잘리듯이 잘려지진 않았다. 혜성은 벗어나고 싶었다. 지독한 운명의 굴레를 제 손으로 끊어내고 싶어했다. 그래서 혼자서 조용히 이별을 준비했다. 며칠에 한번 꼴로, 밤마다 자신의 방으로 무작정 찾아드는 정혁을 한마디 불평없이 받아내면서, 혜성은 혼자서 아무 내색도 없이 끝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혁은 조금도 몰랐다. 정혁이 둔했던 거거나, 혜성이 치밀했던 거였다.
그래서, 정혁이 스무살이 되던 오늘- 오늘이 바로 디데이였다. 혜성은 정혁에게 스무번째 생일 선물로, 가혹한 운명의 끝을 알렸다. 일부러 지독하게 굴었다. 오만 정 다 떨어져서, 차라리 그가 철저히 나를 버렸으면 좋겠다고- 그걸 바랬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러기를 바랬다. 착각이었을까.
그저 팔짱을 낀채 비스듬히 서서 정혁을 싸늘하게 노려보던 혜성이, 어느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정혁에게 달려들었다. 전세는 180도 역전되어, 이번엔 정혁의 멱살이 혜성의 손아귀에 쥐어채있었다. 정혁은 허망하게 두 손에 힘이 풀려버렸다. 너 이런 놈이었냐. 독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지독하게 낯설었다. 금새, 야무진 주먹이 날라왔다. 퍽, 소리와 함께 입술이 터졌다. 왼쪽으로 돌아간 고개를 제자리로 추스르기도 전에, 다시 한번 주먹이 날라왔다. 이번엔 더 셌다. 정혁의 입에서 윽, 하고 속으로 먹히는 비명이 터졌다. 세번째로 주먹이 날라오는 걸 느끼고는, 정혁이 얼른 손을 뻗어 손목을 잡아챘다. 허공에서, 혜성의 손목이 정혁에게 막힌채 휘청였다.
“너, 나 약 먹은 건 아냐? 내가 네깟 새끼 때문에, 수면제 꾸역꾸역 약 쳐먹은건 아냐? 어?”
혜성의 입술은, 모질고도 지독하게 움직였다. 그 입매가 만들어내는 공허한 곡선은, 처절하기만 했다. 그래, 죽고 싶었다. 잔인하게 얽힌 모든 굴레를 떨쳐내고 싶어서,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었다. 정혁이 여행간다며 집을 비운 그 3일동안, 혜성은 망설임없이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200알 가까이 되는 수면제를 목 뒤로 꾸역꾸역 넘기면서도, 의식이 물컹하게 흐려지면서도, 혜성은 그 순간에마저 정혁이 보고싶은 제 가슴속을 통째로 도려내고 싶었다. 고작 병원에서 초라하게 눈뜨고 싶지는 않았다. 이건, 정혁에겐 고스란히 숨겨온 일이었다.
“위세척 하는데 기분 더럽더라. 차라리 뒈져버렸어야 했는데. 그럼 다시 이렇게 너하고 마주보는 일 따위 없었을거 아냐.”
“너….”
“역시 뒈져버릴걸 그랬지? 어? 나같은거, 아직도 살아있어서 불쾌하겠네. 더러운 새끼 그냥 콱 뒈졌으면 속 시원한건데. 안그래? 어?”
음울한 눈동자가 크게 일렁이는가 싶더니, 정혁의 몸이 힘없이 추락했다. 스치듯, 정혁의 손이 혜성의 허리를 훑더니, 그가 투둑, 무릎을 꿇었다. 고스란히 내려다보이는 정혁의 정수리에, 혜성은 마른침이 저절로 삼켜졌다. 정혁의 탄탄한 어깨가 들썩인다 싶더니, 금새 크극, 하는 퍼석한 비명과 함께 울음이 터켰다. 당신, 이렇게 약한 사람이었나. 그런 모습은 낯설었다.
“마지막이란 말은 아직 하지마.”
처절했다. 운명의 끝은 이렇게 다가와있었다. 그러나 정혁은, 이런 마지막은 싫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내가 어떻게 너를 이대로 보낼 수가 있겠어. 계속 입안에서 껄끄럽게 맴돌던 말이었다. 정혁은 초조하게 입술을 씹었다. 혜성의 목소리는 모래알처럼 꺼끌했고, 옅은 한숨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렇게 끝이라니. 그런 말이 어딨어. 정혁은 목구멍이 꾸역꾸역 메었다.
“아직은 아니야, 혜성아..”
“웃기지마.”
“아직은… 아직은 안돼…”
아직은 안돼. 마지막 그 말은 혜성에게 미처 닿지 못했다. 앗, 하는 그 순간에- 혜성의 무릎을 정혁의 손아귀가 아프게 잡아채는 바람에, 금새 혜성의 몸이 풀썩, 뒤로 넘어갔다. 쿵, 소리를 내며 아프게 바닥으로 곤두박질 친 혜성의 몸 위로, 순식간에 정혁의 몸이 묵직하게 짓눌러왔다. 퍼석한 입술 사이로 금새 비명이 비집어 나왔다. 허겁지겁 입술을 찾아 무는 움직임에, 혜성이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저항했다. 이러지마! 혜성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그만 목구멍 너머로 먹혀버렸다. 정혁의 손아귀가 혜성의 양 볼을 아프게 쥐어채자, 저절로 혜성의 입이 벌어졌다. 그 사이로, 금새 뜨거운 혀가 밀려들었다.
이러지 마. 이러면 안돼. 이제 끝이라고 했잖아.
정혁의 단단한 무릎이, 혜성의 허벅지를 아프게 짓눌렀다. 그 바람에, 혜성은 숨넘어가듯 비명을 토해냈다. 스치듯 얽혀든 정혁의 눈동자에는, 그저 서슬퍼런 광기만 가득했다. 약간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혜성의 셔츠 단추가 힘없이 우두둑 뜯겨나갔다. 메마른 가슴팍으로 끈적한 호흡이 고스란히 쏟아졌다. 그 난폭한 동작을 도저히 저지할 수가 없어서, 혜성은 온몸에 힘이 쭉 빠져버렸다. 그래, 너 좋을대로 해. 하지만, 이게 마지막이야.
정혁은 몸이 달아있는 것보다, 마음이 동했다. 이대로 놓칠 수 없다는 조바심이 잔뜩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널 어떻게 보낼 수가 있겠어. 열여덟, 그 치열했던 나이에 처음 찾아온 사랑이었다. 갑작스레 운명의 장난처럼, 형제가 되었다고 해서 그 물컹한 감정이 변할리가 없었다. 더럽다고 욕하면서도, 정혁은 그를 지독하게 원하고, 갈망했다. 그건, 또다른 이름의 사랑이었다. 사랑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 색이 바래어 어느새 집착과 광기로 고착되고 있었다.
혜성의 비어버린 눈동자가, 하늘 구석에 닿아있었다. 목덜미를 아프게 물어도, 허리를 격하게 쓸어내려도, 바지 앞섶을 억지로 짓눌러도- 혜성은 미동도 없이 그저 텅 빈 눈동자만 꾸물꾸물 움직였다. 나무토막처럼 누워있는 혜성을 거칠게 다루던 정혁의 손이, 순간 정지했다. 이게, 무슨 소용이겠어. 억지로, 널 안는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풀썩, 정혁이 유연하게 돌아누웠다. 나란히 하늘을 보고 누워서는, 거칠어진 숨만 쌕쌕 몰아쉬었다. 하늘엔, 붉은 물감이 제멋대로 흩뿌려져 있었다.
“그래, 알았어.”
정혁의 꺼끌한 목소리가, 퍼석하게 허공을 갈랐다. 그 바람에, 혜성이 시선을 돌렸다. 무슨 말이야.
“가라. 보내줄게.”
차라리, 사랑하지 말걸 그랬어. 그렇지, 혜성아. 차라리, 처음부터 너를 몰랐다면 좋았을걸. 그래도, 메마른 내 삶에 사랑한다는 그 네 글자가 조금의 위안이 되었을까.
어서 가라. 맘 변하기 전에. 정혁은 혜성을 돌아보지도 않고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혜성은, 몇초간의 정적을 두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구겨진 셔츠를 펴고, 뜯겨진 앞섶을 꼼꼼히 여몄다. 그 동작이 마치 준비되어 있던 것처럼 너무나 당연해서, 정혁은 서러웠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훌훌 털고 일어날 줄 알았던 혜성은, 그대로 가만히 멈춰 앉아있었다. 그러다가, 한참만에 짙푸른 목소리가 바닥에 스물스물 내려앉았다.
“좋았던 그 시간만 고스란히 잊어. 그러면 돼…”
우리가 사랑했던, 그 열여덟의 짧았던 봄날만 잊어. 그러면 돼. 그거면 충분해. 모두 잊고 살 수는 없는 거였다. 형으로, 동생으로 그렇게 남을 운명이었다. 그렇다면, 그 짧았던 찰나의 봄날만 모두 잊고 살자고, 그렇게 혜성은 다짐했다. 혜성의 말에, 정혁 역시 조그맣게 끄덕였다.
차가운 옥상 바닥에, 정혁만 남겨둔채 혜성은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그 단순한 동작 하나에, 정혁은 울컥 가슴 밑바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가지마. 가지말라고. 속으로는 피를 토하듯 울부짖으면서도, 정혁은 애써 그를 외면했다. 그래, 잊자. 애초에 없던 일로 하자. 찬란했던 그 봄날은, 사실 처음부터 잔인한 겨울이었다고. 그렇게 생각하자, 우리. 혜성의 서글픈 발자국 소리와, 덜컥- 옥상 문 닫히는 소리가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모든 게 끝났다. 끝이 이렇게나 쉬울수가 있을까. 정혁은, 크극- 웃음이 터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