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날이었다. 벽에 낙서를 하고 싶어서 주머니를 탈탈 털어 모인 동전 몇 개로 문방구에 들러 분필을 색색깔로 마련했다. 집 앞 벽이 너무 더럽다. 페인트가 여기저기 긁히고까져서 보기가 참 흉하다. 그래서 내가 예쁘게 낙서를 해 줄 생각이었다. 학교가 끝난 시간이다보니 길거리가 어둑어둑하다. 지름길인 뒷골목으로 들어서니, 젖통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옷을 입은 여자들이 싸구려 향수냄새를 폴폴 풍겼다. 향수가 정말 싸구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왠지 그랬다. 싸구려향이라는 게 있다면 그 향이어야만 할 것 같은 편견. 옷이라기 보다는 천 쪼가리의 사이로 보이는 풍만하고흰 가슴이 사람의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집앞의 가로등이 보였다. 나의 아늑하고 포근한 가로등. 내가 사랑하는 가로등. 내가왔어요. 내 정신이 쪼개지려던 그 날, 까만 구렁텅이 한 가운데에서 나를 위로해준 가로등아, 사랑해요~ 언제나 내가 오면 길가에서 나를 맞아준다. 가로등과 마주보며 웃고, 인사해. 그저 다정하고 따뜻한 빛을 맞고 있노라면 시간은 금방 사라진다.
새벽 2시의 골목에 가로등과 나. 단 둘 뿐이다. 방해하는 사람도, 가로등 외의 불빛도 전혀 없다. 다정한 노란빛이 내 등을 지켜주고 나는 따뜻한 마음으로 벽에 분칠을 시작했다. 두어번 허공에 팔을 들었다 놓았다. 결국은 아무것도 그리지 못하고, 무얼 그리면 좋을지 몰라서 슬퍼졌다. 그래서노란색 분필로 벽 대신 아스팔트 바닥에 불빛이 퍼져있는것을 배껴 그리기 시작했다. 노랗게 노랗게 노랗게 밝게 밝게 밝게 더 노랗게 노랗게 노랗고 반짝이게 아름답게 예쁘게.
가로등은 나와 함께한 시간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내가 좋았을까, 싫었을까, 귀찮았을까, 지겨웠을까. 이런저런 얘기를 나 홀로 가로등에게 중얼거리다 보니 아주 조금 쓸쓸했다. 그래도 가로등이 말을 할 수 없는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로등은 내가 싫어도내색을 하지 않아. 내가 귀찮아도 저리 비키라고 상처 주지 않아. 움직이지도 않아서, 내가 보고싶을 때는 아무 때나 가서 볼 수 있다. 가로등과 함께 있으면 아프지 않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다정한 가로등...
수다2007. 10. 12. 2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