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제2007. 4. 15. 18:53


서른 즈음에















“혜성아, 나 왔어!”



우당탕, 소란스럽게 정혁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가 들어옴과 동시에 그의 몸을 감싼 찬 겨울기운이 집안으로 휘몰아친다. 차가운 기운에 팔에 바스스 소름이 살짝 끼쳐와도, 상쾌하고 기분이 좋다. 정혁의 목 뒤를 간질이는 약간 길어버린 까만 머리에 듬성듬성 흰 눈송이가 깜찍하게 숨어있다. 갈색이 도는 정혁의 몸을 감싸고 있는 쫙 빠진 코트에서도 눈송이가 사르르 떨어져 내리고 있다. 작고 고운 눈이 좁은 현관으로 추락해 금새 물로 변해버렸다.



“들어 오기 전에 눈 좀 털고 들어와. 현관에 물 좀 봐.”

“오늘 차 교수 수업 휴강이라서 일찍 왔어, 애들이 술 마시자 그러는데. 혜숭이 보고 싶어서 일찍 왔지~”  



혜성의 잘은 핀잔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정혁은 웃음기가 감도는 눈을 살짝 휘며 집에 일찍 오게 된 사정을 신나게 설명했다. 엄마의 칭찬에 굶주린 어린 아이처럼.



“제발 좀 나가서 놀아라, 응? 집에는 왜 일찍 겨들어오구 난리야.”



말은 퉁명스럽게 내뱉어도 표정이 이미 풀려있어서, 저런 말은 정혁에게 먹히지 않는다.



“뽀뽀뽀뽀뽀뽀~”

“으휴, 진짜 넌 언제 클래?”



눈이 녹아 젖은 정혁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툭 건드리면서, 혜성이 정혁과 눈을 맞췄다. 언제 봐도 편안하고 따뜻한, 깊은 눈이다. 정혁이 양팔을 활짝 벌리며 혜성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안아주세요’ 라는 무언의 요구.



혜성은 아주 잠시 젖어있는 정혁의 코트와 정혁의 눈을 번갈아 보며 이걸 안아줘야 하는 건지 고민에 빠졌지만, 그 역시 곧 양팔을 벌리고 겨울을 몸에 휘감은 자신의 연인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추우니까 안아주는 거야. 담엔 얄짤없다.”

“이래서 겨울이 좋아. 혜성이가 나긋나긋-“



빨갛게 얼은 정혁의 코가 따듯한 혜성의 목덜미에 폭 파묻혀서 사르르 녹았다. 정혁은 그대로 혜성을 안으며 헐렁한 스웨터 아래로 살짝 드러난 혜성의 쇄골에 입맞춤했다. ‘흐응-.’ 혜성이 코 안쪽으로 기분 좋은 신음을 내며 입 꼬리를 살짝 올렸다. 서로의 가슴이 맞닿아 기분 좋은 심장의 고동을 전해준다. 두꺼운 코트 사이는 느껴지지도 않는 것 같다. 그래도 큰 단추가 걸리적 거리는 지라 혜성은 정혁의 등을 안았던 팔을 풀어서 정혁이 입고 있는 코트의 단추를 푸르고 이내 코트를 벗겨낸다. 살풋 내리 앉은 눈으로 정혁의 까만 정수리를 바라보다가 혜성이 문득 말했다.



“우리 십 년 후에도 이러고 있을 수 있을까.”



그때까지도 혜성의 긴 목덜미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던 정혁이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이내 고개를 번쩍 들고 눈을 빛내며 혜성의 말을 되짚었다.



“십 년 후에도?”

“…….”

“우아, 그럼 우리 서른이네?! 신기하다. 서른…. 난 내가 지금 스물이라는 게 믿기지두 않는 단 말야. 난 언제까지나 십대일 줄 알았는데.”

“그래, 난 네가 스물이라는 게 안 믿긴다, 문정혁아. 언제 철들래.”



혜성의 통통하게 살이 오른 두 볼을 손바닥으로 꾹 쥐고는 혜성의 눈 안에 새기듯이 눈으로, 또 입으로 정혁이 말했다.



“우린 스물도 함께 보냈으니까. 서른 즈음에도 함께야. 서른뿐이냐? 마흔도 두렵지 않다! 죽을 때까지 네 옆에 있을 거니까 그렇게 알아.”



말 도 안 되는 정혁의 엉뚱한 논리지만, 왠지 수긍이 간다. 저렇게 솔직한 눈으로 그런 말을 하면 어떤 소리를 하던 다 믿어 버릴 수 밖에 없다. 정혁이 일년 전, 시험 도중에 장난 같이 사랑고백쪽지를 던졌을 때도, 짜증나는 마음에 홱 돌아본 정혁의 눈이 한없이 진지해서, 두근거렸을 때도, 그랬다.



정혁이 두 눈을 꼭 감고 살짝 벌린 입으로 천천히 다가와 자신의 입을 살짝 덮을 때도 혜성은 내려 앉은 정혁의 가지런한 속눈썹만 지켜 보았다. 그리고 정말 현실로 마주 닿아오는 축축한 정혁의 입술을 고대로 느끼면서, 그제야 안심하고 웃었다. 정말 온몸으로 느껴지는 행복이라서. 서른 즈음에도 정혁과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도 행복과 함께 온몸에 퍼졌다. 뭘 하든지 연인과 함께여서 행복한 스무 살의 나른하고 따뜻한 겨울.






Posted by 기린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