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2008. 7. 27. 01:18


 어제는 오늘 날짜가 어떻게되더라 하고 가만히 누워있다고 깜짝 놀랐다. 챙겨야지 하고 생각은 마음 한 구석으로 하고 있었는데 학교에 갔다오고 개학을 하고나서도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은 페이퍼 문제때문에 바쁘게 보내다보니 금방 잊고 지나가 버렸다. 심지어 크게 싸우고서도 기억했던 그 애 생일인데. 거의 일주일이 지난 상태에서 뭐라고 연락을 하는것도 참 껄끄럽고 그렇다고 그냥 넘기자니 가까스로 다시 말을 트고 지내는 어색한 사이가 더 어색해질 것만 같다. 혹시나 만약에 내가 연락하기전에 본인이 이 글을 본다면 조금이나마 이해해주길.. 오래 사귀었던 사이라는 것도 얼마나 부질없는지 참 허무할 뿐이다. 그런데 또 그렇게 따지면 생일이라는게 오랜사이 운운해가며 꼭 챙겨야하는 중요한 일인지도 의문이다. 카리나는 생일 챙기는걸 싫어한다고. 생일이란게 그 사람이 이 세상에 나온 축하할만한 날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해서 그 날에 그 사람이 또 나오는것도 아니고. 응? 무슨말을 하고 있는거야 맨날 삼천포라니까.

 누군가를 깊게 사귄다는게, 누군가를 새로 사귄다는게 얼마나 힘들고 지치는 일인지, 날이 갈 수록 very very very much aware. 받는것만으로도 안되고 주는것만으로도 지치고. 지나치게 받아 부담스럽다는 걸 왜 모르는걸까. 주는걸 왜 고맙다고 여기지 않는걸까. 난 알면서도 내가 받을땐 부담스러워서 싫고 줄 때는 그게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걸 종종 잊곤한다. 거기다가 나는 항상 착한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항상 예의바르게 대답하고 싶어하고 싫어도 좋은척하고. 이런 내가 가증스럽고 가식적이고 밉고 사악하고 가소롭다. 흥.

 어제는 새로운 사람을 하나 만났다. 나보다 두 살이 많은 남자인데 원래는 H와 아는 사이다. 굉장히 곱게 생긴 그 분은 꿈이 가수라고 묻지도 않았는데 열심히 얘기하셨고 그 외에도 나의 미래설계도 관심사 인생의 목표 기타등등 처음 만난 자리에서는 보통 하지 않는 얘기를 계속 끄집어 냈다.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나름 신선했다! 그렇게 조곤조곤 사근사근 그런 얘기를 속사포처럼 줄줄 꺼내놓는 남성은 흔치 않아. 데니스를 나와 퀸스트리트를 걸으면서 H와 얘기를 했다.

'이 오빠.. 좀 느껴져.'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거 같아.'
'말투가 완전 조신.'
'게이 애들 많이 만나봐서 알지만, 헤테로애들이 그렇게 말하는건 한번도 못 봤어도 게이애들이 그렇게 말하는건 봤거든. 여자 좋아한다고 하는데 사실은 남자를...'
'그럴지도 몰라.'
'아냐, 어쩌면 자기가 게이인지 모르는 걸지도 몰라!'
'헉, 그럴 가능성이 높다.'

불쌍한 사람. 그 분이 장황하게 늘어놓은 자신의 인생설계도나 철학적이고 유익한 말은 쏙 골라놓고 우리는 그 분의 사근한 말투를 가지고 그 분의 성정체성에 대해서 진지하고 심각한 대화를 하고있었다. 어찌되었든 처음 만난 사람과 친해지는건 어려운 일이다. 다시 한번 만날 수는 있게 될까?

오늘은 굉장히 늦게 일어났다. 3시 28분엔가 일어난거 같은데 밖이 굉장히 어둡다. 바람소리도 굉장하고 빗방울이 창문에 '충돌'하는 수준의 소리가 나고있다. 게다가 밖에 차가 안다니는데 경찰이 도로 한복판에서 서성거리네. 도대체 이게 무슨일?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서 조금 있는데 갑자기 고함소리같은게 들려온다. 이건 또 뭐야. 창문밖으로 시선을 돌렸더니 시위대가 있었다. 이나 이건 또 뭐지? symonds st에서 시위할 일이 도대체 뭐가 있는걸까. 이 나라에서 시위가 날만한 일이 있는것도 아니고. 아님 요새 살인사건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너무 궁금해 견딜수가 없어서 평소에 절대로 해본적도 없는 짓을 했다. 모뎀수준으로 느려터져서 내 열통을 터트리는, 그래서 요 며칠은 별로 하지도 않은 인터넷을 켜고 구글에서 뉴스를 봤다. 콘돌리짜 라이스 뉴질랜드 방문. 그래서 시위하는구나. 랭엄호텔에서 자나보지? 오 신기한데 우리집 앞 건물에 유명한 사람이 머문다니. 이런생각을 하고 있을때 쯤 H한테 문자가 왔다.

-omg fucking wind i nearly died walking home.
-they say its one of the strongest in decades and there are protesters on symonds st!
-michin nom duel... pick the wrong day to protest outside. wat r they protesting?
-condeleeza rice came to nz this morning
-Omg tats why the weathers so horrible

저 문자를 보고 한참을 깔깔댔다. 아 센스있어.

-she brot all the nasty wit her, nutella!
-hahaha NUTELLA!!

우리는 우리만의 의미를 부여한 단어를 라이스한테 마구 써대면서 즐거워했다. 덕분에 방바닥에 정신없이 널려있는 쓰레기와 옷더미때문에 심란했던 기분이 좀 가벼워 졌다. 그래서 깨끗하게 방청소를 마쳤다.


NUTELLA!!!!

기분좋고 재밌는 단어다. 마치 fried green tomatoes에서 '토완다!' 같은 느낌이랄까.

Posted by 기린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