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제2007. 4. 15. 19:02

토요일. 수업이 끝난 후에도 한참을 교실에서 가만히 앉아있었다. 청소 당번인 아이들의 청소를 도와주고도, 할 일 더럽게 없다고 집에 가서 공부나 하라는 핀잔을 그냥 조용히 웃어 넘겼다. 학생이 하나도 없는 교실은 너무나 다르다. 새벽의 매끄럽고 단정한 느낌의 교실은 9시경의 묘하게 들뜬 그 교실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그런데 새벽의 교실은, 또 들큰한 해가 뉘엿뉘엿 져가는 오후의 교실과 다르다. 빛이 가득 들어차 충만하고 따뜻한 교실.

혜성이가 딱 그런 사람이었다. 빛이 가득 들어 찬 오후의 교실같은 다정한 사람. 그냥 가만히 바라 보고만 있어도 가슴 가득 벅찬 감정을 실어주는 그런 사람.

우리반, 내가 앉아있는 창가에서는 학교 아랫 쪽 공원의 벤치가 훤히 들여다 보인다. 어김없이. 익숙한 교복의 누군가가 벤치에 느슨하게 풀어져 누워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그 노곤한 모습이 너무 익숙하고 반가워서 조그맣게 웃었다. 내가 토요일 오후, 빈 교실에 혼자 남아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서 피씨방에 갈 것 같은 혜성인, 뜻 밖에도 토요일 오후면 어김없이 혼자서 풀밭에 나가 드러누웠다. 말간눈으로 이곳 저곳을 두리번 거리기도 했고, 죽은 듯이 가만히 누워서 눈을 살풋 감고 있기도 했다. 누워서 팔을 비스듬히 이마에 대고 쨍하게 내리쬐는 해를 피하던 혜성이가, 슬금슬금 몸을 일으켰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손목시계의 분침바늘은 애매하게 숫자 7과 8사이 그 어딘가에 놓여있었다. 나도 가방을 추스리고 교실을 나섰다.


아무도 없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은 학교의 유리문을 열자 쨍-, 하고 오후의 강렬한 햇빛이 내 눈을 찔렀다. 그 강한 빛에 잠시 정신이 혼미해지는 느낌이었다. 행여, 혜성이가 가버렸을까 나는 신고있던 삼선 쓰레빠를 가방에 우겨넣고 운동화를 재빨리 구겨 신었다. 헐레벌떡 교문을 나서 골목을 돌자, 햇빛을 받아서 엷어진 갈색 머리를 한 혜성이가 보였다. 눈물이 팽- 돌 만큼 감동적인 혜성이가 입은 교복! 반듯하게 다려져 접혀있는 흰 칼라. 손목보다 아주 살짝 길게 딱 떨어지는 소맷자락. 마른 다리를 적당히 가려 감싸주는 선이 날렵한 바지. 한 쪽 어깨에 비스듬이 걸쳐 맨 검정색의 홀쭉한 가방까지. 모든 게 나에겐 감동스러웠다.


“혜성아-!”


느리고 여유로운 동작으로 혜성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혜성인 내가 그의 뒤에 어디 쯤 있을 거라는 걸 짐작했을까? 그의 눈에 내가 들어오자, 이내 혜성인 눈을 샐쭉 휘었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달려가기까지의  짧은 시간동안 그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내가 혜성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까지도 혜성인 그렇게 서서 가만히 하늘을 바라봤다. 그래서 뭐가 보일까 하고 나도 위를 올려다 보았다. 우리의 양옆으로 선 건물의 끝자락, 얽히고 섥힌 까만 전깃줄, 파랗디 파란 하늘과, 몽실몽실한, -파란 하늘과 경계가 애매모호하게 뒤 섞인- 흰 구름 뿐이었다. 그게 전부였는데도 이상하리 만치 아름답다고 느꼈다. 마치 딴 세계에 와 있는 듯한 아름다운 풍경.


“그거 알어? 예쁜 하늘은, 하늘을 자주 바라보는 사람 한테만 보여.”

“그건 당연 한 거 아냐?”

“당연한건데도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니까.”


우리는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학교 옆 골목 한가운데에 그렇게 가만히 서서 구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고요하고 평온했다. 이 순간이,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이, 너무나도 편했고 익숙했고 좋았다. 마냥 좋기만 해서 겁이 날 정도야.

혜성일 보지 않아도 혜성이가 손등으로 눈을 가볍게 문지르는게 곁눈으로 보였다. 하늘을 올려다 보던 고개가 살짝 뻐근해질 무렵 혜성이가 말을 꺼냈다.


“갈까?”

“그래.”

“언제부터 있었냐?”

“아아까. 한참 전부터.”

“바보같긴.”

“지금, 몇 시야?”


갸우뚱. 아직 쨍쨍한 해를 잠깐 바라보던 혜성이 입술을 쭈욱 내밀며 발음했다.



“두우- 시.”

“야, 시계도 안 보고 어떻게 알아, 니가.”

“해 보니까 두시인거 같아서.”


자기가 말해 놓고도 황당한 대답인줄은 아는지 킥킥대며 웃는다. 슬쩍, 내 손목에 걸린 시계를 훔쳐보니 분침이 12를 넘길랑 말랑 하고있다. 제법 정확하네? 알쏭달쏭 맹한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혜성이가 슬쩍 웃음지었다.


“사실은, 넌 항상 토요일 두시쯤에 이렇게 나타나니까.”


혜성이가 사랑스러운 콧망울을 한 쪽 손가락으로 부비적 댔다. 웅얼웅얼대는 발음으로 '모를 줄 알았어, 그럼?' 하고 뾰족하게 모인 입술로 오물대며 말한다. 따사로운 햇볕에 코가 간질간질. 재채기가 나오려나 보다.

혜성이의 다른 한 쪽 손은.
아까, 아까 전- 하늘을 볼 때 부터, 하늘에 섞인 구름처럼 알게 모르게 내 손과 스르륵 맞 닿아 있었다.



Posted by 기린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