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
개학하고 하루였나 이틀이었나, 날이 지나가고 나는 꼭두새벽부터 다크룸에 기어들어가 좀비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d가 말했다.
너 올해도 계속 암실작업할거면 다크룸 하나 내 줄게 black and white로 할거야 colour로 할거야?
음 아직 모르겠는데 아마 우선은 bw로 할거같아. 음 모르겠어 더 생각해볼게. 아니 기껏 생각해서 방 준다는데 왜 나는 더 생각해보겠다고 한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어쟀든 그렇게 말하고 며칠이 더 지났는데 다시 물어보길래 우선 흑백으로 하겠다 했더니 자기 오피스로 가서 키 리퀘스트 폼을 가져와 나에게 안겨주었다. 후딱 싸인을 하고 메인오피스로 가서 내고오니 며칠후에 이메일이 왔다. 키 찾아가라고. 아아아아 봐도봐도 좋은 그 메일. 그 다음날 당장 가서 키를 내 손에 쥐었는데 어찌나 뿌듯한지. lp에게 좋아하는 남자가 집사주면 이런기분일까? 라고 했었나? 하여간 비슷한 소리를 누군가에게 했던 것 같은데. 정말 그런기분이었다.
요새도 매일매일 출근도장 찍는 나의 다크룸. 오히려 집에서 있는 시간보다 거기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다. 내 다크룸 바로 앞은 d의 개인 다크룸.
검정테이프
얼마전에 신기해서 샀던 야광네일폴리쉬를 저녁에 아무 생각없이 바르고 잤는데 그 다음날 프로세스해야할 필름이 있다는걸 까맣게 잊었다. 다크룸에 들어가서 불을 껐는데 쌔까만 어둠속에서 빛나는 10개의 동그라미들. 난감하기 그지없고도 황당해서 웃음만 나와서 혼자 킬킬대다가 d를 찾아갔다.
i have glow-in-dark nails, are they gonna ruin the films?
박장대소하며 의자가 넘어갈듯이 웃던 d가 자기 책상위에서 까만 테이프 롤을 가지고 내가 서있던 곳으로 걸어왔다. 라이트 프루프 테이프. 마스킹 테이프 재질과 비슷한 그 테이프를 조금씩 찢어서 내 손톱 위에 하나씩 붙여줬다. 열손가락 전부 다. 그 사람 손 위에 내 손을 올려놓고, 손가락 하나하나가 닿았다가 떨어지는 느낌은 글로는 표현하기가 힘들다. 그냥 테이프 던져주면서 붙이라고 했을 수도 있는데 하나하나 붙여준것도 나로서는 좋았고, 붙이면서 오늘은 손톱에 스마일리 페이스들이 없네 하는 것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