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2010. 3. 21. 17:19

열쇠

개학하고 하루였나 이틀이었나, 날이 지나가고 나는 꼭두새벽부터 다크룸에 기어들어가 좀비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d가 말했다.
너 올해도 계속 암실작업할거면 다크룸 하나 내 줄게 black and white로 할거야 colour로 할거야?
음 아직 모르겠는데 아마 우선은 bw로 할거같아. 음 모르겠어 더 생각해볼게. 아니 기껏 생각해서 방 준다는데 왜 나는 더 생각해보겠다고 한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어쟀든 그렇게 말하고 며칠이 더 지났는데 다시 물어보길래 우선 흑백으로 하겠다 했더니 자기 오피스로 가서 키 리퀘스트 폼을 가져와 나에게 안겨주었다. 후딱 싸인을 하고 메인오피스로 가서 내고오니 며칠후에 이메일이 왔다. 키 찾아가라고. 아아아아 봐도봐도 좋은 그 메일. 그 다음날 당장 가서 키를 내 손에 쥐었는데 어찌나 뿌듯한지. lp에게 좋아하는 남자가 집사주면 이런기분일까? 라고 했었나? 하여간 비슷한 소리를 누군가에게 했던 것 같은데. 정말 그런기분이었다.
요새도 매일매일 출근도장 찍는 나의 다크룸. 오히려 집에서 있는 시간보다 거기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다. 내 다크룸 바로 앞은 d의 개인 다크룸.

검정테이프

얼마전에 신기해서 샀던 야광네일폴리쉬를 저녁에 아무 생각없이 바르고 잤는데 그 다음날 프로세스해야할 필름이 있다는걸 까맣게 잊었다. 다크룸에 들어가서 불을 껐는데 쌔까만 어둠속에서 빛나는 10개의 동그라미들. 난감하기 그지없고도 황당해서 웃음만 나와서 혼자 킬킬대다가 d를 찾아갔다.
i have glow-in-dark nails, are they gonna ruin the films?
박장대소하며 의자가 넘어갈듯이 웃던 d가 자기 책상위에서 까만 테이프 롤을 가지고 내가 서있던 곳으로 걸어왔다. 라이트 프루프 테이프. 마스킹 테이프 재질과 비슷한 그 테이프를 조금씩 찢어서 내 손톱 위에 하나씩 붙여줬다. 열손가락 전부 다. 그 사람 손 위에 내 손을 올려놓고, 손가락 하나하나가 닿았다가 떨어지는 느낌은 글로는 표현하기가 힘들다. 그냥 테이프 던져주면서 붙이라고 했을 수도 있는데 하나하나 붙여준것도 나로서는 좋았고, 붙이면서 오늘은 손톱에 스마일리 페이스들이 없네 하는 것도 좋았다.
Posted by 기린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