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빛이 푸르스름하게 도는 아침에 창 밖을 보니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따뜻한 이불 속 기운에 조금 더 잘까, 하다가. 이 날씨에도 집에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일을 하러 나왔을 혜성이형이 생각나버려서 벌떡 일어나버렸다. 춘 삼월인데도 겨울 기운이 오슬오슬하게 들어서 나는 내 팔을 감싸안았다.
혜성이 형은 줄곧 하던 학원강사를 그만 두고, 우리집에서 꽤나 가까운 거리에 있는 작은 까페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그는 나의 선생님이었다. 형이라고 그를 부르게 된 건, 혜성형이 학원강사를 그만 두고 나서의 일. 까페에서 일하는 그에게 매일 같이 찾아가 선생님,선생님 하고 쫑알대는게 머쓱했는지 어느 날, 이제는 선생님이라고 하지 말고 형으로 불러 달라했다. 나는 정말 날아갈 것 같이 기분이 좋았다.
아직 졸음이 덜 가신 눈을 부비고 고양이세수를 했다. 오늘은 하루종일 공강이라서 느지막히 일어날까 했는데. 비오는 날씨에 자전거를 탔을 형이 걱정되어서 더 잘 수가 없다. 행여 빗길에 미끄러졌을까, 사고는 나지 않았을까. 아닐 걸 아는데도 괜한 걱정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길을 나서니 투둑투둑, 빗방울이 내 투명한 우산위로 퉁기는게 경쾌했다. 내 옆으로 지나가는 알록달록한 우산을 쓴 어린아이의 땡땡이 무늬 장화를 보고있자니 나도 문득 저런 장화를 신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장화를 보면 혜성이 형이 뭐라고 해줄까?
“혀엉-!”
“어어, 비 오는데 왠일이야.”
까페 안으로 들어서자 창문너머로 까페 뒷편에 비스듬히 세워져 빗방울이 송골송골 매달린 혜성형의 빨간 자전거가 보였다. 비닐이라도 덮어 둘 것이지. 형은, 형 자전거만 봐도 이렇게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짓게 되는 이런 내 마음 알까.
“비오는데 자전거 탔어?”
알면서도, 형 목소리 좀 더 듣고싶으니까 물어보고.
“걷기엔 멀구 택시타기엔 뭣하니까 할 수 없지.”
그렇게 듣게 된 형 목소리가 너무 달콤해서 녹아버리는 내 마음 추스리고 다시 웃고.
“길 미끄럽진 않았어요?”
“응, 괜찮았어. 뭐 마실래?”
“핫초콜렛! 크림 얹구 계피가루 많이 뿌려서. 아, 마쉬멜로우두!”
“이 자식, 요구사항이 많다?”
쓰윽 웃으며 형이 말하는 동안, 형의 입술사이에 간당간당하게 살짝 물린 형같이 늘씬하고 하얀 담배를 물끄러미 보았다. 아슬아슬하고도 아름다웠다. 정말이지 형의 입에 물린 담배라도 되고 싶은 심정에 또 한번 울컥했다.
“형, 담배 좀 끊어~”
밀크워머로 걸어가던 형이 다시 내가 앉아있는 소파로 고개를 사악- 돌리더니 눈을 조금 휘어보였다.
“안 그래도, 어제부로 끊었어 담배.”
“그럼 입에 물고있는 건 담배가 아니고 뭔가요~?”
“입이 심심하니까 물고 있는 것 뿐이야.”
학원에 있을 때 하도 담배를 피워댄다고 몸이 담배 연기에 훈제 됐을거라며 우스갯소리로 붙여준 별명은 ‘훈제혜성’. 나라 전체가 금연 열풍이어도 꿋꿋하게 담배를 피던 그가 도대체 어떤 심경의 변화로 담배를 끊는다는 것인가?! 나는 적잖이 놀라 벙- 쪘다.
그는 익숙한 손길로 우유를 적당량 따라 뎁히며 거품을 냈다. 보글보글 끓는 우유에 달콤한 코코아 가루를 섞고 크림을 예쁘게 올렸다. 분홍색의 봉긋한 마쉬멜로우를 두개 크림 위에 얹고, 향긋한 계피가루를 솔솔 뿌렸다. 어제와 똑같이 익숙한 형인데, 다르다. 심지어 담배를 아슬아슬하게 물고 있는 것 까지 똑같은데도 다르다…. 그는 물고있는 담배를 피지 않을 것이다. 왜…왜, 어째서?
혜성이 형이 보기만해도 달콤한 핫초코와 자신이 마실 모닝 커피를 들고 와 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아직은 이른 아침이라 손님은 나 밖에 없다. 게다가 오늘은 비도 오니까.
“그래서, 이유가 뭐에요?”
“응? 무슨 이유?”
“담배 말야. 왠 끊은건데…?”
“아아- 그거. 별 거 아닌데-”
별 거 아닌데- 하며 말꼬리를 늘이며 묘하게 웃는 형을 보면서 내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왠지 듣고 싶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야, 나.
“정혁이가 담배 끊으라고 아주 난리를 치잖아.”
꾸욱-, 심장이 쥐어 짜이는 것 처럼 아파왔다.
“뭐, 어차피 좋을 건 없으니까. 담배값도 계속 올라서 부담도 되고. 이런저런 이유로 끊어보려고.”
“담배 끊지마, 형. 다시 펴요. 응? 나 사실 형 담배피는 모습이 좋아.”
“요 녀석이 아침부터 장난질이네? 언젠 끊으라며.”
근데, 내가 그렇게 끊으라고 할 땐 끊지 않았잖아. 들은 척도 안했잖아. 꾸욱꾸욱, 일그러진심장은 다시 회복되기가 힘들 것 같이 아프기만 했다. 이게 현실이야. 다 알고도 좋아한거잖아. 괜찮아.
“혜숭아!!”
진짜 더럽게도 죽이는 타이밍이지. 아무말 못하고 내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형의 그 사람이 까페 안으로 들어왔다. 비 냄새를 잔뜩 데리고. 눈동자를 위로 돌리자, 잔뜩 흥분해서 기뻐하는 혜성형 얼굴이 들어왔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다.
“ 어?! 뭐야, 너너너너너너, 담배 끊기로 했잖아!”
“아후, 쪼옴. 방정 좀 떨지마. 그냥 물고 있는거야. 애 앞에서 창피하지두 않냐?”
애 취급은 싫어. 날 바라봐 주지 않는 것도 싫어. 타박하는 말투인 주제에 그렇게 행복한 얼굴인 것도 싫어. 그렇게 그 사람에게 웃어주지 않았으면 한다. 나에게만 그렇게 웃어주면 안돼 형? -제발.
“형, 담배 안 폈어요. 내가 봤어요.”
“으하하, 들었냐 문정혁? 아후-, 역시 우리 강아지 밖에 없어.”
사랑이 항상 달콤한 것만은 아닌가봐. 이렇게 좋아하는데, 사랑하는 것 같은데. 항상 형이 해주는 핫초코는 달기만 해서, 형을 향하는 내 사랑도 달콤할 줄로만 알았어.
형의 입에 한참 물려있어 축축해진 담배를 형의 연인이 유연한 동작으로 슥- 빼냈다. 그리고 분할 정도로 익숙한 몸짓으로 몸을 낮게 숙여 머리카락이 곱게 내려앉은 혜성형의 반듯한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황급히 고개를 다시 숙여야 했다. 시큰거리는 눈에서 내 눈물이 오늘따라 너무나도 씁쓸한 핫초콜렛 안으로 퐁- 떨어져 내렸다. 매일 이렇게 눈물 섞인 씁쓸한 핫초콜렛을 마셔야 한대도, 그래도 당신을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