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제2007. 4. 15. 18:57



여린 강아지 같은 소년이 포크아트가 장식된 밝은색의 테이블 위에 간신히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서 좁고 작은 어깨를 간간히 떨며 숨죽여 울고 있었다. 몰래몰래.



테이블은 창가 앞에 있었는데, 창틀 안으로 눈부신 금빛 햇살가루가 날려들었다. 주위는 고요했다.

모두가 행복할 것 같은 따스하고 평화로운 오후였다. 소년을 울렸을 법 한 존재는 아무리 주위를 둘

러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바람은 소년에게 눈물을 그치려무나, 하고 발가락 사이를 간질였다.

레몬향이 나는 작고 초록색인 허브 나뭇잎도, 이제는 그만 행복해져야지. 하고 위로했다.

방안을 가득 메운 공기가 소년의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편안해지렴.

잠시 놀러나온 금빛 햇살이 소년의 코 끝에 환히 머무르며 눈물은 이제 곧 마르리라 했다.



구름의 손은 소년의 보드라운 머리칼을 쓸어줄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소년이 단호하게 다물려 결코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입을 열었다. 사뿐히. 조용히.





"오늘은.. 날이 너무 맑아요. 너무 맑아서.. 슬퍼요. 너무 아름다워서 슬프기만 해요."





민들레 씨앗같이 보드라운 작은 손을 계속 눈물이 넘쳐 흐르는 눈에 꾹- 대고 눌렀다. 이렇게 하면

눈물이 그칠까. 슬픔이 멈출까. 했지만, 소년의 눈물은 손바닥사이를 비집고 볼로 계속 흘렀다. 헐

겁게 쥔 주먹 위, 손등에 작은 물방울 하나가 톡- 떨어졌다.





"소풍을 가자고 하고 싶어요.. . 맑은 날 이니까.."





그저 꾹 누르고만 있던 손이 흠뻑 젖어버리자 눈에서 손을 떼고는, 손등으로 눈에 남아있는 물기를

쓱- 훔쳤다. 그러나 이내 다시 물을 솟아올랐다. 바알간 눈가가 아이러니하게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날 좋아해 주는지 모르니까.. 싫어하는지도 모르니까.. 물어보지도 못해요.

'날 좋아하나요..?'

묻고 싶은데.. 용기가 없어요.

'날 사랑해주세요..'

하고 말하고 싶은데.. 그런데.. 흐윽.. ."





  마음을 표현할 줄 몰라 슬픈, 작고 어린 영혼은 구름에 기대 아름다운 날에 조용히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고요한 구름이 전했다.

굳이 소리를 내어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건 세상에 많다고.

입을 통해 말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말하고,

귀로 듣지 않아도 가슴으로 통할 수 있는거라고.



소년은 구름으로 인해 용기를 얻었다. 이내 눈물을 전부 닦아내곤,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입가에

살랑 걸치고 테이블에서 사박- 뛰어내렸다.



'이 아름다운 날이 지나기 전에..

눈으로 말해줘야지. 좋아해요- 하고.

가슴으로 전해줘야지. 내 가슴은 당신으로 인해 이렇게 따뜻해 졌어요- 하고.'



사뿐한 걸음으로 소년은 방을 나섰다.













-미니페 치우
-민우.
Posted by 기린c
안정제2007. 4. 15. 18:53


서른 즈음에















“혜성아, 나 왔어!”



우당탕, 소란스럽게 정혁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가 들어옴과 동시에 그의 몸을 감싼 찬 겨울기운이 집안으로 휘몰아친다. 차가운 기운에 팔에 바스스 소름이 살짝 끼쳐와도, 상쾌하고 기분이 좋다. 정혁의 목 뒤를 간질이는 약간 길어버린 까만 머리에 듬성듬성 흰 눈송이가 깜찍하게 숨어있다. 갈색이 도는 정혁의 몸을 감싸고 있는 쫙 빠진 코트에서도 눈송이가 사르르 떨어져 내리고 있다. 작고 고운 눈이 좁은 현관으로 추락해 금새 물로 변해버렸다.



“들어 오기 전에 눈 좀 털고 들어와. 현관에 물 좀 봐.”

“오늘 차 교수 수업 휴강이라서 일찍 왔어, 애들이 술 마시자 그러는데. 혜숭이 보고 싶어서 일찍 왔지~”  



혜성의 잘은 핀잔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정혁은 웃음기가 감도는 눈을 살짝 휘며 집에 일찍 오게 된 사정을 신나게 설명했다. 엄마의 칭찬에 굶주린 어린 아이처럼.



“제발 좀 나가서 놀아라, 응? 집에는 왜 일찍 겨들어오구 난리야.”



말은 퉁명스럽게 내뱉어도 표정이 이미 풀려있어서, 저런 말은 정혁에게 먹히지 않는다.



“뽀뽀뽀뽀뽀뽀~”

“으휴, 진짜 넌 언제 클래?”



눈이 녹아 젖은 정혁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툭 건드리면서, 혜성이 정혁과 눈을 맞췄다. 언제 봐도 편안하고 따뜻한, 깊은 눈이다. 정혁이 양팔을 활짝 벌리며 혜성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안아주세요’ 라는 무언의 요구.



혜성은 아주 잠시 젖어있는 정혁의 코트와 정혁의 눈을 번갈아 보며 이걸 안아줘야 하는 건지 고민에 빠졌지만, 그 역시 곧 양팔을 벌리고 겨울을 몸에 휘감은 자신의 연인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추우니까 안아주는 거야. 담엔 얄짤없다.”

“이래서 겨울이 좋아. 혜성이가 나긋나긋-“



빨갛게 얼은 정혁의 코가 따듯한 혜성의 목덜미에 폭 파묻혀서 사르르 녹았다. 정혁은 그대로 혜성을 안으며 헐렁한 스웨터 아래로 살짝 드러난 혜성의 쇄골에 입맞춤했다. ‘흐응-.’ 혜성이 코 안쪽으로 기분 좋은 신음을 내며 입 꼬리를 살짝 올렸다. 서로의 가슴이 맞닿아 기분 좋은 심장의 고동을 전해준다. 두꺼운 코트 사이는 느껴지지도 않는 것 같다. 그래도 큰 단추가 걸리적 거리는 지라 혜성은 정혁의 등을 안았던 팔을 풀어서 정혁이 입고 있는 코트의 단추를 푸르고 이내 코트를 벗겨낸다. 살풋 내리 앉은 눈으로 정혁의 까만 정수리를 바라보다가 혜성이 문득 말했다.



“우리 십 년 후에도 이러고 있을 수 있을까.”



그때까지도 혜성의 긴 목덜미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던 정혁이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이내 고개를 번쩍 들고 눈을 빛내며 혜성의 말을 되짚었다.



“십 년 후에도?”

“…….”

“우아, 그럼 우리 서른이네?! 신기하다. 서른…. 난 내가 지금 스물이라는 게 믿기지두 않는 단 말야. 난 언제까지나 십대일 줄 알았는데.”

“그래, 난 네가 스물이라는 게 안 믿긴다, 문정혁아. 언제 철들래.”



혜성의 통통하게 살이 오른 두 볼을 손바닥으로 꾹 쥐고는 혜성의 눈 안에 새기듯이 눈으로, 또 입으로 정혁이 말했다.



“우린 스물도 함께 보냈으니까. 서른 즈음에도 함께야. 서른뿐이냐? 마흔도 두렵지 않다! 죽을 때까지 네 옆에 있을 거니까 그렇게 알아.”



말 도 안 되는 정혁의 엉뚱한 논리지만, 왠지 수긍이 간다. 저렇게 솔직한 눈으로 그런 말을 하면 어떤 소리를 하던 다 믿어 버릴 수 밖에 없다. 정혁이 일년 전, 시험 도중에 장난 같이 사랑고백쪽지를 던졌을 때도, 짜증나는 마음에 홱 돌아본 정혁의 눈이 한없이 진지해서, 두근거렸을 때도, 그랬다.



정혁이 두 눈을 꼭 감고 살짝 벌린 입으로 천천히 다가와 자신의 입을 살짝 덮을 때도 혜성은 내려 앉은 정혁의 가지런한 속눈썹만 지켜 보았다. 그리고 정말 현실로 마주 닿아오는 축축한 정혁의 입술을 고대로 느끼면서, 그제야 안심하고 웃었다. 정말 온몸으로 느껴지는 행복이라서. 서른 즈음에도 정혁과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도 행복과 함께 온몸에 퍼졌다. 뭘 하든지 연인과 함께여서 행복한 스무 살의 나른하고 따뜻한 겨울.






Posted by 기린c
안정제2007. 4. 15. 18:50
 





올 풀린 스웨터 사이로 네 마음이 보일 때




















“아흐, 춥다. 이거 왜 이렇게 쌀쌀해. 아직 가을 아냐?”
“니 생일이 어제였는데 가을일 리가 없잖아. 바보야.”
“이게 죽을라고!”


















어제는 혜성의 서른 한번째 생일 이었다. 서로의 일이 끝나고 9시쯤 만난 둘은 오랜만에 고급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정혁은 부드럽고 달콤하게 혀 끝에서 녹는 티라미수를 음미하면서 오늘 밤은 호텔에 가서 색다르게 놀아보자는 능글맞은 제안을 슬쩍 꺼냈다가 까칠한 혜성의 반응에 -“새꺄, 호텔에서 뒹굴 돈으로 차라리 너 보약이나 해 드쇼. 맨날 빌빌거리는 게, 호텔은 무슨 호텔? 가서 얼마나 뒹굴겠다고? 아서라.”- 깨갱, 본전도 못 찾고 순순히 물러서야 했다. 처음엔 쉽게 물러서는 듯한 정혁이었지만 사실 오전 내내 머릿속에서 그린 요렇고 조런 퐌따스띡한 나이트를 쉽사리 포기하는 게 못내 아쉬워 집에 가는 길 내내 혜성을 요리조리 찔러보았다. 자신의 생일이라 너그러울 법도 한 혜성은 돈이 걸린 문제여서 그런지 꽤나 완고하게 그의 애보기 9단 실력으로 정혁을 찍소리 못하게 제압해낸다.


배가 불러서 나른해진 둘은 설렁설렁 집을 향해 걸었다. 차를 탔다면 10분 만에 집에 도착한테지만 술을 마신 터라 차는 내일 가져오기로 하고 집까지 걷기로 했다. 일부러 어두운 골목길을 골라서 걷는 정혁을 혜성은 탓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어두운 주황색 가로등 아래 둘의 긴 그림자가 사이 좋게 맞닿아 있다.


“생일 축하해!”
“엉?”


입술에 뜨거운 무언가가 금방 스쳤다가 떨어진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자각하기도 전에 입 꼬리가 싹- 말려 올라간다. 정혁은 항상 예기치 못한 행동들로 혜성을 즐겁고 행복하게 했다. 덩치는 산만한 게 귀를 쫑긋 세우고 꼬리를 좌우로 살랑댈 것 같은 뎅그란 멍멍이 눈으로 자신의 눈을 맞춰 올 때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온몸의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입을 손등으로 문지르면서 이게 뭐 하는 짓이냐며, 도둑뽀뽀를 해내고 히죽대는 정혁을 매섭게 흘겼지만, 사실은 급작스레 찾아 든 행복감에 두근대는 마음이 좋았다.


“야, 니가 마냥 십댄 줄 알어? 너 이제 아저씨야.. 알긴 아냐? 서른살두 넘게 먹어 갖곤 길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철 좀 들어라, 문정혁. 어?”
“혜숭이 메롱~”
“이게-?!”


주먹을 머리위로 들어올려 보임 때리는 시늉을 했더니 앞으로 쌩 달려간다. 아직도 자기가 십대인줄 알고 사는 게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리며 혜성은 목덜미를 간질이는 머리칼을 두어 번 쓸어 내렸다.







세월아 네월아, 툭탁대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집이다. 저녁을 하면서 곁들인 술로 어느 정도 달아올라 있던 둘이 침대로 자리를 옮기고 옷을 다 벗어 제끼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특별한 날을 기념하며, 평소와 달리 이런저런 야한 농담도 주고 받으며, 더욱 격한 뼈와 살이 불타는(!) 밤을 보내고는 씻을 겨를도 없이 둘 다 뻗었다. 삼십 줄에 들어서니 확실히 예전 같은 체력이 아니랄까. 홀딱 벗은 채로 잠든 혜성은 12시까지 늘어지게 자고 말겠다, 꿈속에서 굳은 다짐을 했건만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쌀쌀하고 차가운 새벽기운이 나른해져 있는 그의 몸을 온통 휘감자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눈이 반짝 뜨였다. 눈이 뜨이자 마자 보이는 것은 균형적인 굴곡이 있는 정혁의 너른 등이었다. 속으로 감탄까지 해가면서 등 구석구석을 관찰하던 그는 마른 입술을 오므려 ‘호오호오-‘ 바람을 불기 시작했다. 나도 깼으니 너도 깨야 한다는 심술보였다. 등에 찬 입김을 불어 댄지 채 10초가 지나지 않아 정혁이 부르르 몸을 사렸다. 파다닥대는 정혁의 몸짓에 혜성은 깔깔대고 웃으려 했지만, 깔깔거리는 웃음 소리 대신, 어젯밤의 여파와 찬 공기로 인해 잠긴 목구멍 안에서 기괴하고 걸쭉한 소리가 울렸을 뿐이다. 몸을 부르르 떨어대던 정혁이 다시 잠을 청하는 건지 조용하다. 이쯤 되면 몸을 돌려 이쪽을 바라봐 줄 법도 한데. 잠잠해진 정혁의 등을 노려보다가 무거운 팔을 움직였다. 검지손가락을 쭉 뻗어 E.T. 손가락을 했다. 그리고 정혁의 등에 대고 지긋이 꾸욱 눌렀다. 정혁의 등에서 따뜻한 기운이 손가락을 타고 슬금슬금 올라온다. 따뜻해. 「깼어?」 깨지 않은 걸 알면서도 등에다가 깼냐고 손가락 글씨를 쓴다. 힘을 꼬옥 주고 써서 그런지 어두운 빛의 피부에 하얗게 자국이 남았다가 이내 사라지고 있다. 조금은 잠이 깬 건지 몸을 움츠리며 살짝 킬킬댄다. 고개를 절레절레 베개에 부벼대다가 이내 느린 동작으로 몸을 돌려 혜성 쪽을 돌아본다. 눈은 여전히 감은 채다. 그 모습이 또 묘하게 얄미워서 헐벗은 가슴에 외롭게 붙어있는 유두를 꼬집었다.



“으악! 뭐야, 왜 그래 아침부터~”

“눈 떠, 새꺄.”

“아잉, 아침부터 왜 이러실까- 어제는 그렇게 좋다고 앙앙 대시드니, 오늘 아침엔 왤케 기분이 안 좋아?”



혜성은 그 말에 보일 듯 말 듯 얼굴을 붉히며 정혁의 눈을 곧바로 쏘아댔다. 알 바 아니잖아. 라는 의미를 가득 담아서 말이다. 하지만 추위가 그 부끄러움을 덮어 주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얼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혁은 마른 혜성의 팔 위로 자신의 팔을 둘렀다. 몸에 열이 많은 정혁의 온기가 고스란히 피부를 타고 전해져 와서 기분이 좋았다.



“아흐, 춥다. 이거 왜 이렇게 쌀쌀해. 아직 가을 아냐?”
“니 생일이 어제였는데 가을일 리가 없잖아. 바보야.”
“이게 죽을라고!”
”내가 널 두고 죽을까봐? 너두 같이 가는 거야 나랑, 으히히히.”



실없는 소리를 한다며 정혁에게 잔뜩 핀잔을 줬다. 핀잔을 줘도 그건 그 때 일뿐 능글맞은 정혁은 요리조리 말을 돌려가면서 혜성을 곤란하게 하는데 익숙했다. 그렇게 말싸움 같지 않은 말싸움을 하고 나자 이불 안에서도 덜덜 떨릴 만큼 추웠던 몸이 녹는걸 느꼈다. 그런데 몸은 충분히 따듯해 졌지만 왠지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포스트 생일날 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어젯밤의 여파인지 여직 들떠있는 자신을 생소하게 느끼며 혜성은 혼자 멋쩍게 웃었다. 옆에서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정혁이 드디어 실성했다고 손뼉을 치며 좋아했음은 물론이다.



“시끄럽고, 오늘은 breakfast in bed 어때? 신혜성님의 생일 다음 날을 기념하며.”

“…쳇, 맨날 말은 잘 갖다 붙이드라. 그리구서 맨날 in bed는 너만이잖아. 난 맨날 해 갖다 바쳐야 되고. 내가 네 신하냐????”

“신하는 아니지만… 시녀쯤 되지 않을까?”



혜성이 고심하는 듯 눈을 위로 굴리면서 허공에다가 대고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많이 봐줬다는 듯한 억양에 재미있어 하는 목소리가 짙게 베어 나온다. 말장난이 장난 중에 제일 재미있다는 혜성이다. 궁시렁궁시렁 툴툴대면서도 정혁은 이불을 걷고 이내 일어나 앉았다가 침대를 빠져 나와서 창 밖을 바라보며 섰다. 창 밖으론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차 몇 대가 굴러가고 있고, 앙상하게 마른 나무에는 참새가 앉아서 고개를 갸웃대고 있다. 바람이 부는 건지 말라 비틀어져서 간신히 나뭇가지에 붙어 있는 나뭇잎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몸을 비틀고 있다. 싸늘하게 방안을 채우는 새벽공기가 정혁의 맨몸에 달라붙어서 어깨를 움츠렸다가 펴고, 팔을 높게 들어서 이쪽 저쪽 기지개를 켜는데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그걸 지켜보던 혜성이 정혁의 거시기가 기지개를 켤 때마다 덜렁덜렁 춤을 춘다며 좋다고 깔깔댄다.



“좋냐, 좋아? 그렇게 죠아요오 우리 혜숭이~?”



마치 아이를 어르는 듯한 요상한 말투로 좋냐고 물어오는 정혁이 밉상이라 혜성은 엎드린 채로 고개를 베개에 파묻었다.



“아아, 배고프니까 얼른 꺼져, 가서 먹을 거 만들어와!”



베개에 온통 파묻힌 단어 때문에 혜성이 뭐라고 했는지 정혁이 알아 듣지 못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확실히 먹을 걸 바라는 사람의 태도는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정혁은 못 들었지만 들은 척 대강 대답을 하고 (그럼-, 오빠 게 좀 좋아? 킬킬킬.) 저 멀리 문가에 날아간 사각팬티를 주워 들고 냄새를 킁킁 맡다가 상태가 별로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들고 있던 팬티는 홀랑 던져버리고 (나중에 잔소리 들을 게 분명하지만) 서랍장을 열어 새 팬티를 꺼냈다. 연두색 바탕에 팬더가 그려져 있는 정혁이 제일 좋아하는 팬티였다. 팬티에 탄탄한 두 다리를 꿰어 넣고 남색의 널널한 카디건을 걸쳤다. 단추도 하나하나 꼼꼼히 잠궜다. 아래는 팬티뿐이지만 집안에서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 방문을 열고 나왔다. 정혁이 옷을 갈아 입는 동안 혜성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지켜봤다. 고개를 숙여서 꼼꼼하게 손가락을 조물딱대며 단추를 채우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빠가 되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르지만 스스로 옷을 척척 갈아입는 아들을 바라보는 뿌듯한 심정이 이런 게 아닐까 즐거이 상상했다.



정혁은 부스럭거리기도 하고 달그락거리기도 하면서 무언가 열심히 만드는 듯했다, 열어 논 문으로 심각한 표정의 정혁이 눈에 들어왔다. 집중할 때면 으레 그랬듯이 통통한 입술이 살짝 앞으로 돌출되어 꾹 다물려 있다. 그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 같아서 혜성은 피식 웃으며, 팔을 뻗어 옆 테이블을 더듬어 답배와 라이터를 집어 들었다. 일어나자 마자 공복에 한 대, 식후에 한대. 혜성의 오랜 생활 규칙이다. 길고 창백한 두 손가락 사이에 아슬하게 걸려있는 담배에서 회색 연기가 곱게 올라온다. 마른 입술 사이에 늘씬한 담배를 물고, 눈곱이 꼈는지 뿌연 눈을 손등으로 비비다가 폐 속에 가득 머물렀던 담배연기를 후욱- 내뱉었다. 부족한 잠으로 눈이 뻑뻑하다. 정말 어제는 너무 무리해버린 건지 허리가 뻐근하기도 해서 자꾸 이리저리 뒤척이게 된다. 주먹을 쥐고 허리를 콩콩 두들기다 보니 정혁이 쟁반 위에 한 상을 차려 내온다.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은 것 치고는 모양새가 꽤 보기 좋다. 레몬 색의 스크램블드 에그에는 윤기가 좔좔 흐르고 그 옆에는 신선해 보이는 토마토가 썰려있다. 갓 구워낸 토스트에서도 김이 살짝 올라오고 있다. 옆에는 꿀도 가지런히 놓여있다. 토스트에 꿀을 발라먹는 걸 좋아하는 혜성 때문이다. 두 사내가 사는 곳에는 조금 어울리지 않을법한 화려한 꽃무늬의 찻잔엔 고운 수색을 한 홍차가 담겨있었다. 혜성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우와아아아, 맛있겠다!”

“당연하지 누가한 건데.”

“또, 또, 또 시작이다, 저 잘난 척. 맨날 척만 하다 죽어라, 흥.”

“야, 먹을 것도 해다 바치는데 이러기냐?”

“이러기다 어쩔래.”



혜성은 이불을 걷고 베개 두 개를 쌓은 뒤 그 위에 기대어 앉았다. 휑하게 드러난 팔이며 가슴이 서늘했다. 너무 추워서 양 팔을 엑스자로 가로질러 팔뚝을 쓱쓱 문질렀다. 정혁이 쟁반을 침대 위에 엎어지지 않게 조심스레 올려놓고 혜성을 보더니 슬쩍 미소 지으며 옷 줄까? 하고 물어왔다. 혜성이 대답도 하기 전에 혜성의 옷들이 있는 서랍장 앞으로 가서 그의 겨울 옷들이 모두 담겨있는 세 번째 서랍을 열었다. 어떤 게 좋을까 이 옷 저 옷 들춰보는데 혜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거 줘, 그거. 왜 네가 짜준 스웨터 있잖아. 꽈배기에 구멍 뚫린 거.”



아, 그거. 정혁은 고개를 까닥거리며 두꺼운 부피의 옷들을 몇 장 들췄다. 그러자 곱게 개어져 있는 아이보리색의 척 봐도 따뜻해 보이는 스웨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씨익 웃은 정혁이 스웨터를 서랍에서 쑥 빼내어 어깻죽지를 잡고 스웨터를 펼쳐 보였다. 샀다고 하기엔 무언가 엉성해 보이는 모양의 스웨터다. 목이 늘어나 있고 몸통 부분에 있는 꽈배기의 크기가 약간 불규칙적이다. 재미있는 모양이긴 하지만 분명히 입을 수는 있는 스웨터다. 정혁이 스웨터의 아래쪽을 벌려 혜성 쪽으로 가져가자 혜성이 두 팔을 쭉 펴고 팔을 끼워 넣었다. 까맣게 헝클어진 부스스한 머리칼이 옷의 목 구멍으로 보이더니 금방 머리가 쑥 올라온다. 머리가 나오고 나서도 눈은 아직도 꼭 감은 채라 눈꺼풀의 자잘한 주름이 보인다. 반듯하게 다물려 있는 입도 귀여워 보인다. 펼쳐놓았을 땐 의심스러운 모양이 막상 입혀놓으니 보송보송 예쁘다. 정혁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혜성을 본다. 큰 눈이 반짝거린다.



“여전히 이거 입으면 이뻐 보여 너.”

“이거 안 입어두 이쁘거등?”



한번이라도 말이 곱게 나오질 않는 모양이다. 까칠하시다.



“에이, 그래도 겨울만 되면 맨날 이거 입으면서.”



부정할 수 없는 말이라서 대꾸를 하지 않는다. 정혁은 침대에 놓인 쟁반을 혜성의 옆에 놓인 테이블에 올려놓고 폴짝 혜성의 옆에 앉았다. 침대의 스프링이 퉁퉁 튕겼다.



“으으, 허리 아프니까 가만히 좀 있어.”



정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혜성의 옆으로 다가와 딱 붙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찾는 듯이 스웨터를 입은 혜성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혜성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밀어내려 하는 순간 정혁이 ‘그 부분’을 손가락으로 콕 찝었다.



“여기다!”

“흣.”



정혁의 손가락이 찌른 ‘그 부분’에는 혜성의 유두가 정확히 놓여있었다. 혜성이 즐겨 입는 그 스웨터에는 나름 추억의 스토리가 있다.































9년 전 그들이 한창 대학교 캠퍼스를 누비고 다닐 때의 겨울이었다. 날씨가 한창 추워진 11월 중순. 혜성은 월동준비를 위하여 정혁과 함께 쇼핑을 했다. 입을 옷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항상 저 이유로 쇼핑을 몇 번 하긴 했지만 결국 쇼핑 후에 두 손에 남는 것들은 먹을 게 전부라 이번에는 꼭 옷을 보고 오겠다 혜성은 굳은 각오를 다졌다. 한 세시간을 백화점에서 걸어 다녔을까.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파오고. 아무래도 지하매장에 뭘 좀 사먹으러 가자는 말을 정혁에게 꺼내려던 참에 혜성은 시야 한구석에 들어오는 두툼한 스웨터를 발견했다. 아이보리색이 유난히 따뜻해 보였다. 스웨터에 놓여져 있는 꽈배기 모양도 세련되어 보였다.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서 꼭 사야겠다고 다짐을 했건만, 스웨터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붙어있는 가격표를 본 그 순간, 혜성은 눈물을 머금고 그 스웨터를 마음에서 떠 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혜성이 입기에는 너무 고가였던 것이다. 옆에서 다 보고 있던 정혁은 얄밉게 시리, 괜히 눈 만 높아서 이런 것만 고른다며 핀잔을 줬다. 지극히 사실인 그 말에 삐진 혜성은 그 뒤로 쇼핑은커녕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 누웠다. 빌미를 제공한 정혁과 말 한마디 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또 정혁은 괘씸하게도 연락이 없었다. 그때 당시만 해도 둘은 한번 툭탁거리면 일주일은 넉넉히 연락을 끊고 지냈다. 지금이 같이 살기 때문에 싫어도 금방금방 화해를 하는 편 이지만. 11월은 끝 바지에 다다라 어느새 혜성의 생일날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자신의 생일이라는 것을 자각했지만 기분이 축축 쳐지고 우울하기만 했다. 하나뿐인 연인과는 뾰로통한 상태요, 원하던 스웨터는 그저 꿈의 스웨터일 뿐이니 어찌 우울하지 않겠는가. 특별한 날이니만큼 정혁이 자신의 생일을 위해 그 스웨터를 사다 주진 않을까 상상도 많이 했다. 하지만 턱도 없는 일이란 걸 혜성은 잘 알고 있었다. 혜성이나 정혁이나 주머니 사정은 거기서 거기인데. 뻔한 정혁의 주머니 사정에 그런 큰 돈이 어디 나오겠느냐 말이다. 더 쳐지는 기분에 혜성은 이불 깊숙이 몸을 밀어 넣고 눈을 다시 감았다. 어린애처럼 옷 따위에 집착하는 자신의 모습이 싫었다. 엄마가 밥 먹으라고 소리치는 게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아서 우선 다시 일어났다. 엄마가 차려주신 생일 미역국을 후룩후룩 먹고 있는데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열어보니 정혁이다. 손에는 무언가를 잔뜩 들고 있다. 휘둥그래진 눈의 혜성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정혁이 넉살 좋게 들어와 혜성의 어머니께 인사를 꾸벅 한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어이구, 정혁이가 아침부터 웬일이야. 그래, 혜성이 생일이라고 온 거니?”

“네, 그럼요. 어찌 사랑하는 친구의 생일을 그냥 넘길 수가 있겠습니까! 하하.”



친구 좋아하시네. 퉁퉁 뿔은 표정으로 혜성이 혼잣말을 했다. 마음은 이미 정혁의 손에 들려있는 보따리로 흐물흐물 다 풀려 버린 지 오래인데. 정혁이 들고 온 케익에 불을 붙여서 불고 나서 혜성과 정혁, 혜성의 어머니, 동생이 같이 사이 좋게 케익을 먹고 난 뒤, 둘은 혜성의 방에 들어왔다. 아직 말을 붙이기가 어정쩡해서 혜성은 침대 위에 등을 꼿꼿이 펴고 앉았다.



“편히 앉어, 왜 그러고 있어.”



오히려 정혁이 방 주인 같았다. 혜성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정혁을 올려다 보았다.



“여긴 왜 왔냐, 아침부터?”

“왜긴, 우리 사랑하는 혜숭이 생일인데, 내가 안 오면 누가 와? 자. 이거.”

“이게 뭔데?”



선물인건 다 알고 있지만, 한번 예의상. 정혁이 혜성에게 건넨 것은 포장이 곱게 되어있는 약간 큰 상자였다. 혜성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하려 애썼다. 머릿속에선 다시 한번 이 상자를 열었을 때 나올 ‘그’ 스웨터를 상상하고 있었다. 아마 아닐 것이다, 정혁이 그 스웨터를 샀을 리가 없다, 내가 멋대로 상상한 거니까 이 안에서 다른 게 나와도 상심하지 말고 정혁이한테 고마워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되뇌면서도 부푼 마음은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리본을 잡아당기고, 얇은 포장지를 뜯은 후에 상자를 열어본 순간. 혜성은 소리를 지를뻔했다. ‘바로 그 스웨터’가 상자 안에 곱게 뉘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거, 진짜 나 주는 거야?!”



혜성은 엉덩이를 들썩이다가 정혁의 목을 꼭 끌어안으면서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입이 하트모양으로 크게 벌어졌다. 눈이 생긋, 초승달 모양으로 휘었다. 정혁은 머쓱해져서 코 끝을 손가락으로 만졌다.



“아, 응응, 그렇지 뭐. 네 생일이니까. 생일 축하한다.”

“고마워!”



너무너무 갖고 싶었다고 쉴새 없이 들뜬 목소리로 재잘대며 혜성이 지금 당장 입어보겠다며 입고 있던 옷을 훌러덩 벗어 제끼고 스웨터에 목을 밀어 넣었다. 스웨터는 역시 처음부터 혜성을 위해 만들어 진 것처럼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거울 앞을 연신 들여다 보며 너무 예쁘다고, 잘 어울리느냐며 정혁을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정혁은 흐뭇한 얼굴로 스웨터를 입은 혜성을 둘러보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헉’ 소리를 냈다. 그와 동시에 정혁의 손이 혜성의 가슴 부분을 향했다. 차가운 정혁의 손가락이 여과 없이 혜성의 가슴에 닿았다. 혜성은 깜짝 놀라 스웨터를 들춰보았다. 눈에도 훤히 보이는 새끼 손톱만한 구멍이 나있었다.



“으악, 이게 뭐야! 구멍이잖아? 이거 불량인가 봐- 어떡해? 가서 바꿔야 하나?”

“엥? 아, 그… 그게 말야, 혜성아,”

“뭔데?”

“사실은.. 산 게 아니라……”



듣자 하니, 정혁에게 그 스웨터를 살 만한 여력은 되지 않았지만, 그 스웨터를 너무나도 갖고 싶어하는 혜성을 위해 편법을 쓴 것이었다. 동기 (여자)친구에게 뜨개질 하는 법을 물어, 물어서 며칠 밤낮을 뜨개질을 하고 지냈다는 것이다. 처음엔 서툴렀지만, 손이 야무진 정혁은 하다 보니 요령이 생기더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뜨개질을 하다가 코바늘 하나를 놓친 것 같다며 민망해하는 정혁이, 혜성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다시 자신이 입고 있는 스웨터를 내려다보니 꽈배기의 간격이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백화점의 화려한 조명아래 놓여있던 그 비싼 스웨터보다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이 스웨터가 백 배, 천 배는 마음에 든다. 이런 소중한 스웨터는 무엇으로도 살 수 없다는 걸 혜성은 잘 알았다. 사랑으로 뜨인 스웨터! 얼마나 멋진가. 스웨터는 그 뒤로 혜성이 가장 좋아하는 겨울 옷이 되었다.































“이 옷이 그렇게 좋아?”



혜성은 그래 너 잘났다는 아니꼬운 표정을 하며 정혁을 돌아봤다.



“지가 만들어준 옷 좋대도 지랄이야. 그래 좋다!”

“히히히히히, 고마워 혜성아.”

“뭐가”

“응? 뭐긴..”



정혁이 혜성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혜성이 무겁다고 내려오라며 소리소리를 쳤지만 정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엷게 섬유유연제의 냄새가 묻어 나오는 스웨터의 어깨에 코를 묻었다. 혜성이 테이블에 있는 토스트를 집어서 한입 베어 물었다. 바사삭- 하는 소리와 함께 빵 가루가 정혁의 머리에 우수수 떨어졌다. 혜성은 비듬 같다고 깔깔대며 웃기 시작 했다.



“-항상 옆에 있어줘서.”

“--끅끅, 풋, 응? 뭐라고 했어?”

“사랑한다구~”



혜성이 웃음을 간신히 멈추고 의외라는 듯 정혁을 바라보다가 다시 눈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아, 나도 사랑해.”






Posted by 기린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