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제2007. 4. 15. 19:02

토요일. 수업이 끝난 후에도 한참을 교실에서 가만히 앉아있었다. 청소 당번인 아이들의 청소를 도와주고도, 할 일 더럽게 없다고 집에 가서 공부나 하라는 핀잔을 그냥 조용히 웃어 넘겼다. 학생이 하나도 없는 교실은 너무나 다르다. 새벽의 매끄럽고 단정한 느낌의 교실은 9시경의 묘하게 들뜬 그 교실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그런데 새벽의 교실은, 또 들큰한 해가 뉘엿뉘엿 져가는 오후의 교실과 다르다. 빛이 가득 들어차 충만하고 따뜻한 교실.

혜성이가 딱 그런 사람이었다. 빛이 가득 들어 찬 오후의 교실같은 다정한 사람. 그냥 가만히 바라 보고만 있어도 가슴 가득 벅찬 감정을 실어주는 그런 사람.

우리반, 내가 앉아있는 창가에서는 학교 아랫 쪽 공원의 벤치가 훤히 들여다 보인다. 어김없이. 익숙한 교복의 누군가가 벤치에 느슨하게 풀어져 누워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그 노곤한 모습이 너무 익숙하고 반가워서 조그맣게 웃었다. 내가 토요일 오후, 빈 교실에 혼자 남아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서 피씨방에 갈 것 같은 혜성인, 뜻 밖에도 토요일 오후면 어김없이 혼자서 풀밭에 나가 드러누웠다. 말간눈으로 이곳 저곳을 두리번 거리기도 했고, 죽은 듯이 가만히 누워서 눈을 살풋 감고 있기도 했다. 누워서 팔을 비스듬히 이마에 대고 쨍하게 내리쬐는 해를 피하던 혜성이가, 슬금슬금 몸을 일으켰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손목시계의 분침바늘은 애매하게 숫자 7과 8사이 그 어딘가에 놓여있었다. 나도 가방을 추스리고 교실을 나섰다.


아무도 없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은 학교의 유리문을 열자 쨍-, 하고 오후의 강렬한 햇빛이 내 눈을 찔렀다. 그 강한 빛에 잠시 정신이 혼미해지는 느낌이었다. 행여, 혜성이가 가버렸을까 나는 신고있던 삼선 쓰레빠를 가방에 우겨넣고 운동화를 재빨리 구겨 신었다. 헐레벌떡 교문을 나서 골목을 돌자, 햇빛을 받아서 엷어진 갈색 머리를 한 혜성이가 보였다. 눈물이 팽- 돌 만큼 감동적인 혜성이가 입은 교복! 반듯하게 다려져 접혀있는 흰 칼라. 손목보다 아주 살짝 길게 딱 떨어지는 소맷자락. 마른 다리를 적당히 가려 감싸주는 선이 날렵한 바지. 한 쪽 어깨에 비스듬이 걸쳐 맨 검정색의 홀쭉한 가방까지. 모든 게 나에겐 감동스러웠다.


“혜성아-!”


느리고 여유로운 동작으로 혜성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혜성인 내가 그의 뒤에 어디 쯤 있을 거라는 걸 짐작했을까? 그의 눈에 내가 들어오자, 이내 혜성인 눈을 샐쭉 휘었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달려가기까지의  짧은 시간동안 그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내가 혜성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까지도 혜성인 그렇게 서서 가만히 하늘을 바라봤다. 그래서 뭐가 보일까 하고 나도 위를 올려다 보았다. 우리의 양옆으로 선 건물의 끝자락, 얽히고 섥힌 까만 전깃줄, 파랗디 파란 하늘과, 몽실몽실한, -파란 하늘과 경계가 애매모호하게 뒤 섞인- 흰 구름 뿐이었다. 그게 전부였는데도 이상하리 만치 아름답다고 느꼈다. 마치 딴 세계에 와 있는 듯한 아름다운 풍경.


“그거 알어? 예쁜 하늘은, 하늘을 자주 바라보는 사람 한테만 보여.”

“그건 당연 한 거 아냐?”

“당연한건데도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니까.”


우리는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학교 옆 골목 한가운데에 그렇게 가만히 서서 구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고요하고 평온했다. 이 순간이,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이, 너무나도 편했고 익숙했고 좋았다. 마냥 좋기만 해서 겁이 날 정도야.

혜성일 보지 않아도 혜성이가 손등으로 눈을 가볍게 문지르는게 곁눈으로 보였다. 하늘을 올려다 보던 고개가 살짝 뻐근해질 무렵 혜성이가 말을 꺼냈다.


“갈까?”

“그래.”

“언제부터 있었냐?”

“아아까. 한참 전부터.”

“바보같긴.”

“지금, 몇 시야?”


갸우뚱. 아직 쨍쨍한 해를 잠깐 바라보던 혜성이 입술을 쭈욱 내밀며 발음했다.



“두우- 시.”

“야, 시계도 안 보고 어떻게 알아, 니가.”

“해 보니까 두시인거 같아서.”


자기가 말해 놓고도 황당한 대답인줄은 아는지 킥킥대며 웃는다. 슬쩍, 내 손목에 걸린 시계를 훔쳐보니 분침이 12를 넘길랑 말랑 하고있다. 제법 정확하네? 알쏭달쏭 맹한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혜성이가 슬쩍 웃음지었다.


“사실은, 넌 항상 토요일 두시쯤에 이렇게 나타나니까.”


혜성이가 사랑스러운 콧망울을 한 쪽 손가락으로 부비적 댔다. 웅얼웅얼대는 발음으로 '모를 줄 알았어, 그럼?' 하고 뾰족하게 모인 입술로 오물대며 말한다. 따사로운 햇볕에 코가 간질간질. 재채기가 나오려나 보다.

혜성이의 다른 한 쪽 손은.
아까, 아까 전- 하늘을 볼 때 부터, 하늘에 섞인 구름처럼 알게 모르게 내 손과 스르륵 맞 닿아 있었다.



Posted by 기린c
안정제2007. 4. 15. 18:59
 


Go, go, 고3 커플!!♥
BGM –Michelle Branch (feat. Santana)의 유쾌하고 발랄한 Game of Love! (<<찾아들으시오)





시험 첫날을 4일 앞둔 일요일이다. 날이 선들선들 바람이 불고 해가 반짝반짝 화창한 게, 니가 이러고도 안 나가고 배기나 보자, 싸움을 거는 것 같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찬란한 고3명함이 있다. 날씨가 싸움을 걸면 맞 받아 싸워야만 한다. 그런고로 둘은 퀘퀘한 냄새가 나는 독서실에서 엉덩이를 붙이고 화창한 날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고3이란 타이틀은 떨칠래야 떨칠 수 없는 다크서클 같은, 그리고 또 수심깊은 바다에 거주하는 공포의 괴물 문어 같이 거대하고, 무겁고, 끈끈하고…(??) 기타등등. 그런 거 아니겠는가. 아, 여튼간 그런 이유로 우여곡절 끝에 막 시작한 연애의 씨앗은 땅에 파고들어 안전하게 안착하긴 했으나, 어디 물 마시고, 햇빛 쏘이고, 맛난 영양분 공급받을 새가 있어야지! …도저히 자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래서야, 언제 싹 틔우고 꽃피우고, 열매 맺어서 결실을 보겠냐 이거야!’

쥐, 쥐에 기생 하는 박테리아까지 죽은 듯, 고요하기 짝이 없는 독서실에, 불평 불만이 가득 차 부풀어 오른 심술보 볼의 소유자 정필교 군이 신경질 적으로 툭툭 차대는 의자에서 둔탁한 소음이 규칙적으로 울려퍼졌다. 처음엔 그저 한 두번 그러고 마려니 하고 넘겼던 열공인들이 그 소리가 다섯 번 이상으로 넘어가자 찌푸린 인상으로 하나 둘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정필교군에게는 심술보에서 자체 생성되는 프로텍트 레이어가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의 반응은 눈에 조금도 들어오지 않았다. 필교의 발길질은 횟수가 더할수록 거세지고 있었는데, 그 자세한 이유로는 이 시끄러운 소리로 인해 고개를 들어주었으면 하는 사람이 정작 ‘지금 무슨 소리가 나고 있는거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요~’ 라고 말하는 듯한 까만 정수리만 내보인 채 펜을 놀리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에서 울컥- 하고 뜨거운 감정이 치솟았고, 급기야는 그 뜨신 감정이 너무 위로 올라와 요 몇주사이 더 뚱뚱빵빵해진 심술보를 제대로 건드렸다는 데에 있다.
‘참자. 참자. 참자.’ 필교는 불현듯 무진장 억울한 기분이 되었다.

‘나는 네가 옆에 있으면 집중도 안되고 공부도 안 되는데! 넌 안 그런 거야?!’

학생 때는 연애고 뭐시기고 공부에만 전념할 필요가 있다던 엄마의 말씀이 어렴풋이 생각 날 듯 말 듯 뇌 한 구석을 간질였지만, 어쩌겠는가. –늦어버렸다! 이미 연애에 제대로 빠진 필교는 공부따윈 아무렴 어때. 내가 놀고 먹으면 우리 이쁜 정혁이가 벌어다 날 먹여살리면 되지. 라는 안일한 생각 따윌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필교는 책상의자를 열심히 차댔는데, 그 때 더 참지 못한 열혈청년 하나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서 쌍시옷자를 내 뱉을 태세를 갖췄다.

그런데 정혁이 조금 더 빨랐다.

“…그만.”

-오, 나이스 타이밍. 적절한 정혁의 저지에 멈출 줄 모르고 의자를 신나게 차대던 필교가 딱 멈췄고, 열혈청년도 급히 내 뱉으려던 욕설을 다시 주워 담으려는데 둔한 혀가 멈춘 채로 ‘쓰으으--’ 하고 바람 빠지는 쌍시옷 소리를 내고 말았다. 독서실의 시선은 이 카리스마에 가득 찬, 무심하고도 둔한 남자에게 온통 쏠려있었다. 하지만 정혁은 그런 시선엔 별 다른 신경으 쓰지 않았다. 이미 옆 여학교를 지나다니면서 신물 나도록 익숙해진 일이고, 좀 더 정확하게는 쓸 필요도 없는 신경이기 때문이다.

정혁은 여전히 자신을 퉁퉁 부은 표정으로 쏘아보는 필교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는 대체로 눈치가 빨랐으니 철 없는 자신의 남자친구가 어째서 다 뿔어터진 호빵꼴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 짐작을 하고도 남았으리라. 정혁은 가만히 필교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엄지 손가락가 중지 손가락이 닿을랑 말랑 한다. 정작 붙어있는 살은 얼마 되지 않는데 뼈 자체가 워낙 통뼈다. 필교의 표정은 그 때 까지도 사나웠으나 잡힌 손목을 비틀어 빼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실 손목이 잡힌 순간, 적당한 온도의 정혁의 손에서 심장을 전해 받는 기분이었다. 잡힌  부위로 부터 두근두근 심장박동이 온몸으로 울려퍼지는 듯 했다. 어느덧 미지근 하다고 느꼈던 손이 데일 듯 뜨겁게 느껴졌다. 필교는 문득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다. 별다른 의미 없이 했을 사소한 행동에 이렇게 크게 반응하게 만드는 정혁이 얄미웠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정혁이 너무나 좋았다. 자신도 컨트롤이 되지 않는 복합적인 감정이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얽히고 섥히는 가운데 정혁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뚫고 들어왔다. 들릴 듯 말 듯 한 조용한 속삭임인데도 정확하게 들리는게 신기하다.

“무슨 생각해..”

답을 바란 물음은 아니었는지 우물쭈물 눈동자를 굴리는 필교를 보고 마냥 사랑스럽다는 듯 씨익- 웃고는 그제껏 쥐고 있던 손목을 부드럽게 끌었다. 독서실의 사람들은 하나 둘 일분일초가 아깝다는 듯 책상위의 책으로 고개를 돌린 지 오래였고, 민망하게 그때까지도 엉거주춤 서 있던 청년은 그대로 그냥 앉기가 무안했는지 자판기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둘은 고개를 살짝 틀어 서로를 마주보고 쿡- 웃음을 터뜨렸다. 정혁은 다시 혜성의 손목을 제쪽으로 끌어당기며 재촉했다. 필교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입모양으로 ‘뭐?’하고 물었다. 정혁이 초등학생마냥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있는대로 주고 흔들흔들 보채자 필교는 몸을 느슨하게 풀며 그 힘에 이끌려 주었다.

태양은 여전히 화사했고, 바람 역시 여전히 살랑살랑, 딱 기분 좋을 정도의 온도로 피부를 스쳤다. 뜨거운 손목의 연결부분을 식혀주기도 했다. 앞선 정혁이 어디로 발걸음을 할 지 잠시 망설였다. 멈칫하다가 독서실 옆 골목으로 필교를 이끌자, 조금 붉게 상기된 얼굴의 필교가 코웃음을 쳤다.

“풋- 뭐야. 고작 데려온다는 데가 여기야?”
“왜애, 좋잖아.”

느물거리는 말투로 정혁이 대꾸했다. 사실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독서실 건물이 제법 선선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었고, 바로 앞 건물의 유리창에 반사된 햇살 한 가닥이 구석 한 군데를 비추고 있어서 제법 아늑한 느낌도 났다.

“잠깐만 기다려. 마실 거 사올게.”
“엉…”

정혁이 동전을 짤랑 거리며 요 앞에 보이는 슈퍼를 향해 뛰어간다. 그냥 걸어도 금방 닿을 거리인데 뭐가 그리 급한지 모르겠다. 후줄그레한 추리닝 차림에 삼선쓰레빠를 착착착 끌며 뛴다. 뜀과 동시에 머리가 나폴나폴 날리면서 가색으로 햇빛에 비치는게 아무리 봐도 너무 깜찍하다. ‘진짜 단단히 코 뀄구나, 정필교. 하아-’ 속으론 한탄 같지 않은 한탄도 해보지만 입꼬리는 자꾸 올라가기만 한다.

들어간 지 1분도 안 된거 같은데 벌써 정혁이 손목에 까만 비닐봉지를 달랑대며 다시 이쪽으로 뛰어온다. 그냥 천천히 걸어오라고 소리칠까 말까 생각하는 사이에 벌써 몇 발자국 앞에 서있다. 정혁이 무릎을 잡고 밭은 숨을 내뱉으며 호흡을 고른다. 발목께에서 비닐봉지가 바스락댄다. 벽에 등을 기대고 마치 자기 방인 것 마냥 앉아있던 필교가 스윽 팔을 뻗어 비닐봉지를 채갔다. “뭐 사왔어?” 아무것도 안 보이는 깜깜한 비닐봉지에 고개를 들이밀며 필교가 물었다. 그리고는 정혁이 차오르는 숨에 대답을 하기도 전에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빠나나 우유닷!” -하고 외쳤다.

“이거 오랫만이네? 우리 어렸을 땐 되게 자주 사 마셨던 거 같은데.”

톡. 뾰족한 스트로우의 끝이 바나나 우유에 경쾌한 소리를 내며 꽂혔다. 필교의 입술이 오물조물 움직임과 함께 흰 빨대가 노오란 병아리 솜털 색으로 변했다. 달달한 바나나 향이 입안 가득 퍼지자 필교는 행복함을 감추지 못하겠다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꼴깍꼴깍 우유 넘어가는 소리가 날 때마다 그의 목젖이 같이 귀엽게 오르락 내리락 움직인다.

정혁은 한결 안정된 호흡으로 그의 앞에 쭈그려 앉아 턱을 괴고 그런 필교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흐뭇한 표정도, 느슨하게 풀린 표정도 아니었다. 세상에 둘도 없을 마지막 진 풍경이라도 되는 듯 한 없이 진지하기만하다.

숨 한번 안 쉬고 바나나 우유를 빨아대던 필교가 숨이 찬지 급하게 입을 빨대에서 떼고 거치게 숨을 들이쉬엇다. “하악-” 달콤한 바나나 향이 곧장 정혁에게 가 닿았다. 순간 머리가 핑- 돌아버리는 듯한 현기증에 살짝 중심을 잃으며, 벽에 등을 대고 바닥에 긴 두다리를 쭉 뻗고 앉은 필교에게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간신히 두 팔로 벽을 짚었다. 순식간에 정혁의 팔 안에 갇혀버린 필교는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드는데, 필교가 놀랄 새도 없이 정혁이 그대로 입을 맞추어왔다. 심하게 놀란 필교의 손에서 바나나 우유가 툭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정혁은 잠시 입을 떼고 필교와 시선을 맞추었다. 동그랗게 뜬 필교의 눈이 보였다. 이내 다시 눈을 스르륵 감은 정혁이, 다시한번 젖은 필교의 입술에 자신의 입을 맞추었다. 벽을 짚고 있던 팔이 살며시 내려와 그 짧은 시간에도 새빨갛게 물들어버린 필교의 두 뺨을 감싸쥐었다. 필교역시 허공에 어정쩡하게 두었던 팔을 움직여 정혁의 목에 둘렀다. 맞 물린 두 입술 사이로 붉은 정혁의 혀가 조심스럽게 움직여 예의를 갖춘 인사를 하듯 필교의 혀를 톡톡 건드리다가 조금 더 깊숙이 혀를 놀리자 달달하고 싱그러운 바나나 향이 둘의 입안에 가득 맴돌았다. 살풋 감긴 두 쌍의 눈커풀이 첫 키스가 주는 짜릿한 여운으로 잔잔히 떨렸다.



오랜 시간을 마주 닿았던 입술이 촉- 물기를 머금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아직도 현실이 아니라 꿈에서, 그게 아니면 구름위에서 붕붕 떠다니는 느낌이다. 얼굴로 피가 다 몰린 것 같은 느낌에 필교는 입술을 떼고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정혁은 아직 아무 말이 없다.

민망해진 필교가 흘러내린 침으로 축축해진 턱을 손등으로 쓱 문지르며 목소리를 괜히 더 높였다.

“야! 얼른 가서 바나나 우유 하나 더 사와!! 너 때문에 떨어뜨렸잖아. 진짜 인간이… 아까운줄을 모르고!”

정혁은 필교의 동그란 콧망울과 붉게 부풀어 오른, 젖은 입술을 슬쩍 훔쳐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내고, 봐왔던 사람인데도… 아직도 이렇게 곁에 가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벅차다. 언제까지나, 아주아주 오랜시간이 흘러도 이렇게 줄곧 함께였으면 하고 무엇보다 바란다.

아직도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 처럼 뛰어대는 심장을 가지고 정혁이 머리칼을 나풀대며 다시한번 슈퍼를 향해 뛰었다.

드디어 연애의 싹이 텄다.











“야, 야, 야!! 교무실 옆에 전교등수 쫙 떴어!!!”

이런 개 같은. 우린 감수성이 제일 예민한 고삼인데! 어떻게 전교등수 따윌 그렇게 공개적으로 까발릴 수 있는 거야!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달라, 달라, 달라!!!!!!

발 빠른 어떤 아이가 교실문을 활짝 열고 핫뉴스를 전하자 벌떼같이 다들 일어나 왱왱대기 시작한다. 꼴도보기 싫고 듣기조차 싫다는 듯 얼굴을 책상에 파묻고 드러누워 버리는 포기형이 있는가 하면, 가슴 떨려서 못 가보겠다고 가슴께를 두 손으로 부여쥐는 산만한 덩치도있다.

그러나 필교와 정혁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소식과 동시에 눈을 잠시 마주치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의 발걸음을 맞춰 걸으며 교무실로 향했다. 정혁도 필교도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심 떨고있었다. 떨어진 성적은 학생의 본분을 충실히 이행하지 못했다는 거고, 학생의 본분을 어째서 충실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이유는 너무도 분명했기 때문이다. 둘에겐 현재 관계에 균열이 생길 수 있는 제 1의 요소가 성적이라 더욱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필교가 받는 압박은 더했다. 평소 성적이 남들에 비해 우수했던 것도 있고, 장남으로서 받는 부모님의 기대도 컸다. 필교는 아찔해오는 정신을 지탱하기 위해 정혁의 손을 잡고 싶었지만, 학교라서 그럴 수도 없었다. ‘으아. 약해지지 말자, 정필교.’ 그래서 마음을 최대한 가다듬고 담담해지려 노력했다. 필교는 곁눈으로 정혁을 흘끔봤다. 딱딱하게 굳은 입가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는 정혁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둘은 어느덧 교무실에 다다랐는데, 그 앞은 이미 각 반에서 몰려든 아이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밀려들고 나가는 아이들 틈에서 몇 분을 허부적대고 있으려니 필교와 정혁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숫자와 이름이 빼곡한 종이 앞에 서있게 되었다. 끝도 없이 늘어진 종이에 빼곡한 글씨들을 보자니 현기증이 날 것만 같아다. 필교는 잠시 그 앞에서, 자기이름을 맨 위에서부터 찾아야 할지 맨 아래에서부터 찾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남자는 깡이지!’ 하는 이 고민과는 별 상관이 없는 듯한 ‘깡’을 운운하며 위에서부터 차근차근 이름들을 짚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1등 이선호. 에이씨. 이 새끼는 또 전교1등이야? 재섭서. 2등 김동완. 3등 이민우. 4등 박충재… 뭐?!?! 바악충재?? 뭐야, 이 새끼… 고액과외라도 한거야? …………………44.45.46.47. 아이, 시발. 도대체 몇등이 떨어진거냐!!! 우어, 엄마한테 죽게 생겼… 49 정필교. 끼악!!!! 다행이다. 그래도 50등 안은 고수했어. 어흐, 기특한 넘!! 잘했어, 필교야.’

한참 떨어진 전교 등수에도 나름 만족해주는 여유를 부리며 자신을 칭찬하던 필교는 1등부터 50등까지의 등수에 정혁의 이름이 없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다급한 마음이 한층 고조되었다. ‘아, 정혁이가 자격지심 느끼면 어떡해? 헤어지자 그러면 어떡해!!!’ 필교는 눈을 미친듯이 굴려대며 정혁의 이름을 찾았다. 다행이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정혁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전교 99등. 간신히 턱걸이로 100등 안에 들었다. 필교와 정혁은 다시 눈을 마주쳤다. 둘의 눈에서 스파크가 파바박 하고 튀었다.

‘아, 키스하고싶어.’
시험의 긴장감도 나름 풀리고 성적까지 나왔는데 조금은 느슨하게 가도 되겠지. 교무실에서 점점 멀어져 아이들이 시야에서 하나둘 사라지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팔을 조금 움직여 가까이에 위치하던 서로의 손을 마주잡았다. 열개의 손가락이 퍼즐이 맞아가듯 맞물려 미지근한 온기를 내고 있었다.

둘은 복도 끝에 있는 캄캄한 화장실로 쏙 흡수되듯 빨려 들어갔다. 키들대는 정필교군의 웃음소리가 심상치 않다. 정혁은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좁아터진 칸막이 안으로 필교의 등쌀에 밀려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위로 쭉 쨰진 눈이 둥글게 휘며 자신을 응시하다가 다시 자잘한 주름을 내보이면서 살풋 감기는 걸 정혁은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음엔 공부 더 열심히 할거지?”

쪽. 쪽.

“응.”

쪽. 쪽쪽.

조그만 소리도 잘 울리는 화장실에서 듣기에도 민망한 쪽쪽대는 소리를 아주 크게 내가며 둘은 입술을 뾰족하게 세우고 자잘한 버드키스를 해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좀더 질척하게 혀가 섞이자 정혁의 허벅지가 필교의 센터를 지긋이 누르며 압박해왔다. “으으… 하아-, 헥헥헥, 야, 잠깐!” 정혁은 왜 그러냐는 듯 순진한 얼굴로 큰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필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여.. 여기서?” 살짝 감긴, 갈라지는 목소리로 필교가 말을 꺼냈다. 정혁은 충실한 애완견마냥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필교의 큰 손바닥이 정혁의 반직반질하고 잘 생긴 이마빡을 따악- 쳤다. “웃기고 있다, 새꺄. 미쳤냐? 너 야동좀 작작 보라고 내가 했어, 안 했어? 엉?! 애가 왠 이상한 것만 봐 와가지곤 세우고 덤벼드는데 미치겠네 진짜?”

‘아니!!!!!!!! 내가 언제 세우고 덤볐다고!???????’ 전적이 없는(?) 정혁은 억울했지만, 나중의 거사를 위해 참기로 했다. 둘은 서로 같은 생각(-이따가 집에가서 보자. 훗.)을 하며 다시금 키스에 열중했다. 아, 달다.






결국 연애로 인해 공부에 집중 할 수 없던 건 누구였는지 말하지 않아도 시험성적이 잘 드러내 주고 있었다. 애써 태연한 척 하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


Posted by 기린c
안정제2007. 4. 15. 18:58
S.O.S; Story of S


2.xx


가만히 책상 앞에 앉아서 바니쉬로 반짝이는 책상의 주름같은 무늬를 찬찬히 세었다. 잘려진 나무의 단면은 마치 사막의 굴곡 같기도 했다. 사하라 사막에 간 이 아이의 아버지. 이 아이는 엄마와 함께 3명의 동생과 산다. 얘 아빠는 엄마와 이혼 후 그의 여자친구와 함께 산다. 엄마는 싫어. 아빠가 사하라 사막에서 돌아오면 아빠가 사는 곳으로 거처를 옮길거라고 자신을 세뇌하듯 그 말을 되 읊곤 했다. 아빠 여자친구가 널 반길 거 같냐, 아서라 얘야. 속으로만 묻어두고 밖으론 꺼내지 못한 말이었다. 그의 아빠는 군인이다.

그의 말로 인하면 그의 어머니는 그가 남자를 사귄다는 사실 보다는 그에게 남자건 여자건 ‘누군가’를 ‘사귀고’있다는 사실에 질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에게는 두 살이나 어린 애인이 있다. 어느 날, 그가 해사한 얼굴로, 까르륵대는 것 같은 말투로 내게 종종종 다가와, 나 애인이 생겼어. 놀라지마. 남자앤데, 나보다 두 살 어려. 어때? 하고 할 때. 거짓말 안하고, 순간 무언가가 내 머리를 징- 하게 압박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무심한 말투로. 이 철딱서니 없는 것. 하고 내뱉었다. 나는 그가 현재 그의 옆에 두지 못한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내게 인정받고 싶어했고, 기대고 싶어했다. 그는 나의 말에 다소 시무룩해했다.

그의 엄마는 그와 그의 동생의 존재를 귀찮아 한다고 그가 그랬다. 그 말을 할 때, 그는 웃고 있엇으나, 그의 통통하고도 길쭉한 종아리는 계속 그의 오른쪽 무릎을 불안한 듯 문질러 댔다. 꼬아 올린 다리의 무릎이 바알갛게 물들었다. 그게 딱해보였다.

그 이후로도 그는 하루의 반 이상을 아버지와 함께 살 생각으로 부풀어 있다. 그의 얘기를 멍하니 듣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만약에 사하라 사막에 간 얘네 아빠가 죽었다면? 아무래도 사막은 나에겐 그저 상상이나 환상 같은 거니까. 어디엔가 있다고는 듣고 사진으론 보았지만, 현실감은 없다. 현실감이 전혀 없는 거니까. 그러니까 이런 못된 상상도 가능한 거라고 나를 납득시켰다. 혜성인 여전히 꿈꾸고 있다.

6.xx

겨울이지만 중천에 뜬 해는 나무 창틀을 강하게 때린다. 금방 불이 붙어 무너질 것 같은 반질대는 나무 창틀. 사하라 사막에서 그의 아버지는 무사히 돌아오셨다. 그는 이제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한테 어떻게 말하지? 이미 아빠와는 말도 마쳤고 짐도 다 싸놨다고한다. 그럼 뭘 망설이는 거냐고 흥미없다는 말투로 가장해서 넌지시 물어보았다. 괜히 심각해 질 필요는 없다. 그의 불안만 더 재촉할 뿐이다. 그냥.. 그냥. 엄마한테 이 집이 싫으니까 이 집을 나가서 이젠 아빠랑 살겠다고 말하기가 힘들어. 나는 속으로 은근히 비웃었다. 엄마 모르게 모든 걸 다 준비해 놓은 걸로 이미 그녀를 기만한 건데, 뭐가 또 두렵니. 그래서, 이제와서 그만둘거냐고. 아니. 그래도 금방 생각 해 낸것은. 뚫었다가 막힌 귀 다시 뚫으면 아프다는 거. 뛰놀다가 엎어져서 까진 무릎도 다시 넘어지면 또 까지고, 깨지고 아픈거고.

저번에 얼핏 보게 된 그의 엄마가 생각났다. 애쉬그레이. 그야말로 잿빛이었다. 거의 다 세어가는 까만 머리가 조금 지저분하게 얽혀있었다. 주름이 자글자글 한 그녀의 화장기 없는 창백한 얼굴은 다소 신경질 적이었지 아마. 연습은 언제 끝나느냐고, 집에 언제 갈 거냐며 그를 닦달하고 있었다. 그는 눈을 깜빡깜빡. 몇번을 또박또박 감았다가 떴다. 그리곤 엄지와 중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피곤해 보였다. 그녀의 하이핏치 목소리에 나도 덩달아 골이 울리는 듯 했다.

The next day

익숙한 교실의 익숙한 내 자리에 가서 앉았다. 첫 교시라 난방이 덜 된 교실은 추웠다. 조금 일찍 온 건지 교실엔 아직 아무도 없다. 진정 겨울이 좋다. 볼을 아프게 에는 그 느낌이 즐거웠다, 그 후에 온기를 받아 사르르 녹으며 간질간질해지는 그 느낌도 즐겼다. 아무도 없는 겨울의 교실은 싸늘하고 고요하고, 아름답다. 반질반질한 책상에 머리를 뉘였다. 어젯밤 잠을 설친 탓에 눈이 뻑뻑했다. 책상에 마주 닿은 볼이 시큰할 정도로 시렸다. 이 느낌이야. 몸을 살짝 부르르 떨며 책상에게 내 온기를 나눠주고 있는데, 껄찌르륵 하고 나무가 긁히며 밀려서 아우성대는 소리가 났다. 교실의 문은 상당히 낡아서 조금 힘을 주어야 열리는데 그럴때마다 저렇게 힘겨운 소리를 낸다. 안타깝다. 아름답지만 삭막하게 여겨지는 교실로 들어오는 이를 아무도 맞이 하지 않는 것은 조금은 많이 쓸쓸하고 슬프다. 그래서 나와 온기를 나누던 책상과는 잠시 작별을 하고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혜성이다. 달려온 걸까, 그의 입에서는 조금 힘겹게 하얀 숨이 뱉어져 나오고 있었다. 머리를 감은건지, 땀에 젖은건지, 아니면 머리를 안 감아서 그런 건지 머리칼이 군데군데 뭉쳐있다. 자신을 응시하는 나를 바라보곤 이내 눈을 살짝 휘어보인다. 다른이라면 모를까, 그에게 하는 인사는 조금 어색하다. 너무 오랫동안 알고 지내서 그냥 눈으로, 어 너 왔냐. 반갑다. 이쪽이 더 편하다. 그의 눈은 반짝반짝 신기하게 유난히 빛을 내고 있었는데 그와 반면 그의 얼굴은 하루새에 조금 헬쓱해져 있었다. 눈 아래에 살이 조금 더 도톰하게 튀어나오고, 그 아래에는 한층 더 짙어진 거뭇거뭇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엇다. 까맣게 박힌 눈동자만 유독 신이났다. 그에게는 큰 블레이져가 줄줄 흐러내려 발갛게 곱은 손가락의 반을 다 가렸다. 블레이져 밖으로 나온 손가락들이 움찔움찔 이따금 움직였다. 긴 다리가 부러질 듯 휘청휘청 휘며 걸음걸이를 만들어냈는데, 그게 또 이상하게 가뿐해 보였다.

-후아, 드디어 옮겼다. 그는 한숨을 토해내듯 말을 뱉었다. 그리곤 내 옆으로 와서 슬쩍 앉았다. 그의 홀쭉한 가방이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려 바닥에 사뿐 내려앉았다. 이렇게 말하면 웃길테지만, 무척이나 우아해 보였다. 가방은 텅텅 빈 것 같다. 종이 한 장이나 들어있을지 모르겠다.

“엄마가, 나가래. 막 소리지르더라. 당장 나가래. 꼴도 보기싫으니까. …그러지 않아도 나갈거라는데. 참. 하아…”
“…….”
“그래서, 올리비아가 와줬어. 알지? 울 아빠 여자친구. 차 좋더라.”
“…옮기니까 좋아?”
“응. 좋아. 그렇게 편하게 잔 거 정말 오랫만이었던 거 같아.”

근데 얼굴은 왜 그렇게 잠 못잔 사람처럼 퉁퉁 부었냐고 묻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별달리 하고 싶은 말도 없어서. 가만히 책상과 뺨을 나란히 하고 시선 둘 데 없이 눈만 깜박였는데, 그가 홀쭉 찌그러진 가방을 다시 집어든다. 바시락 대는 소리가 잠깐 들리고 이내 모퉁이가 찢겨나가고, 수십번은 더 접었다 폈다 한 것 같은 꼬질꼬질한 종이 한장을 꺼내들었다. 아무것도 안 들어있을 줄 알았는데, 정말 종이 한장은 들어있네.

“이거 봐봐.”

때 탄 종이를 나에게 내민다. 착착 접혀있는 종이를 폈다. 머리가 비정상적으로 큰, 아마도 사람으로 추정되는 생물이 두 개 그려져 있다. 너무 작고 가는 몸뚱아리 때문에 그만한 머리가 붙어있다는 게 더 신기했다. 크레파스가 서로 쓸리면서 생겼을 지저분한 자국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컸는데, 그는 위로 삐죽삐죽 솟은 머리에 무섭게 치켜 오라간 세모꼴 눈을 하고 있었다. 손에는 칼까지 쥐고 있어서 함층 더 그를 섬뜩해 보이게 만들었다.

“혜준이가 그렸어.”

오히려 제대로 된, 그러니까 조금 더 어른이 그렸으면 전혀 느낌을 주지 않을 그림인데, 혜성이의 여덟 살 배기 셋째 여동생 혜준이가 그린 그림은 너무 정직하고 순수해서 어떤 그림이든 곧이 고대로 일어버릴 것 같은 착각을 준다. 그 그림이 아무리 현실성 없는 괴물 나부랭이 낙서라 해도. 이내 그 옆에 자리한 대화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오빤 니가 너무 싫어. 널 죽여버릴거얏!’ 글씨가 참 반듯반듯하게도 써져있다. 여덟 살 답지 않게 ‘싫어’의 받침이 똑바로 쓰여 있었다. 그래서 더 선뜩한 기분이 되었다. 옆에는 혜준이로 추정되는 양 갈래 머리를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푸른색으로 꼼꼼하게 칠해진 눈물 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는데 무려 얼굴의 반만했다. 너무 놀라서, 목이 잠기는 거 헛기침으로 좀 풀어주고, 잠자코 그림만 응시하는 그의 옆모습을 보았다. 여전히 물기베인 축축한 모습이다. 발간 코 끝은 마치 그가 한참을 울어서 그리 된 것처럼 보였다.

“이…이게 뭐야? 혜준이가 그린거라구?”
“응. 어제 집에서 나가는데, 혜준이가 나와서 홱- 던지고 방으로 다시 들어가드라? 자는 줄 알았는데… 기지배.”
“근데, 왜 이런 걸…”
“내가 밉대. 저랑 혜민이랑 혜소 두고 나만 딴 데 가서 산다니까. 내가 저희들을 버리고 도만 가는 거 같나봐. 내가 저들 귀찮아해서 아빠네로 가는 거라고…”

얼마나 맘이 쓰렸을까. 그래도 그렇게 아끼던 여동생인데. 사진까지 지갑 한쪽에 꼽아놓고 생각날 때마다 내 동생 너무 예쁘지 않느냐고 자랑을 해 대던 녀석이다.

짐스럽긴하지만.. 조금 부담되는 건 사실이지만, 귀찮은건 아냐. 나 그래도 내 동생들 많이 사랑하는데, 이런 말 부끄럽지만…. 혜성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뭐가 뭔지 모르겠어. 우선 내 머리는 지금이 편하고 좋은거라고 잘 했다고 하는데. 진짜 잘 하는 짓일까? 반짝이던 눈이 눈물에 젖어 들어간다. 여전히 반짝거린다. 하지만 맺힌 눈물을 흘려 보내지는 않았다.

누군가 올 법한 시간인데 아직 아무도 등교하는 사람은 없다. 고요하고 차가운 교실안에는 혜성이와 나, 단 둘뿐이다. 그러니까 조금 용기를 내 보았다.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이 정도쯤이야. 얼어서 뻣뻣해진 두 팔을 조금 움직여 아직 찬 기운이 덜 가신 듯 서늘한 기운을 내는 그의 등을 감싸안았다. 흰색으로 깨끗하게 빨아 다린 그의 칼라 깃 위의 솜털 보송한 정갈한 목선이 긴장하는게 느껴졌다. 그는 약간 놀란 듯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흘끗 보았다. 애걸하는 눈빛에 호기심과 즐거운, 약간의 흥분까지 섞인 걸 난 느낄수 있었다. 그는 내 다른 쪽 팔을 자신 앞으로 끌어 당기더니 팔 위에 조그마한 그의 머리통을 뉘였다. 그래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정혁아. 라고 들릴 듯 말 듯 내 팔에 잔잔한 울림을 남기며 혜성이가 말했다. 투명한 겨울의 뜨거운 태양이 교실안으로 들어와 내 눈에 찡한 통증을 남겼다. 눈이 시큰거린다.

And so on…

아직은 겨울이다. 여전이 겨울이 좋고, 아직은 좀 더 겨울을 즐길 예정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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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ed on what i've heard from S
sorry mate,
and thank you.
Posted by 기린c